계열 건설사의 법정관리 신청으로 `꼬리 자르기' 논란에 휩싸인 대기업들이 퇴직연금 가입을 미끼로 금융회사에 자사 상품 구매를 강요하는 이른바 `역 꺾기' 행태를 보이면서 퇴직연금 시장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금융업 진출을 꾀하는 일부 기업은 퇴직연금 가입 조건으로 금융회사가 보유한 다른 금융회사 기업 지분을 싼값에 넘길 것을 요구하는 등 불법 기미도 엿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당국의 감독 강화와 함께 퇴직연금 사업자, 수요자 모두 자정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상품권 등 강매…지분 매각가 인하 요구설

4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일부 대기업은 최근 50여 개 퇴직연금 사업자 가운데 20여 개 금융회사를 1차 사업자로 선정해 퇴직연금 가입 시 제공 가능한 혜택을 제시할 것을 요구한 뒤 한 금융회사가 제안한 혜택을 다른 금융회사에 알려주고 금리 인하와 추가 혜택을 요구하고 있다.

금융회사들은 대기업들이 요구하는 혜택이 과도한 수준이어서 다른 퇴직연금 가입자들과의 형평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일부 전자업체나 통신업체는 퇴직연금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자사 전자제품을 사거나 유무선 전화, 인터넷망 가입 등을 요구하고 있으며 일부 유통업체의 경우 자사 상품권을 사 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담배 등 유해 상품의 구입을 요구하는 업체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은행이 보유한 카드사 지분 인수를 통해 카드업 진출을 꾀하는 일부 대기업이 해당 카드사 지분을 많이 보유한 은행들에 퇴직연금을 할당해 주는 대신 지분 매각가격을 조정할 것을 주문했다는 설도 파다하게 나돌고 있다.

금융감독 당국도 이러한 소문이 시장에 도는 점을 확인하고 관련 정보를 파악하고 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예금, 대출 등 금융상품 금리 조정은 물론 은행이 보유한 제2금융권 지분 매각 가격의 조정까지 요구한 것으로 안다"며 "이같은 거래가 현실화되면 법적 제재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 교란행위 감독 및 자정 노력 필요

대기업들이 금융회사들에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은 수천, 수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직원 수를 바탕으로 퇴직연금 시장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사업자 수가 50개를 넘어서면서 경쟁이 치열해져 금융회사들은 대기업의 요구를 거절했다가는 생존 여부가 불투명해질 수 있는 실정이다.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HMC투자증권, 하이투자증권, 현대증권, 한화손해보험, 동부생명, 동부화재 등 대기업 계열 금융회사들이 계열사 물량을 싹쓸이 해가면서 은행 등 순수 금융회사들은 더욱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전문가들은 금융회사 간 과당경쟁 단속에 나선 금융당국이 퇴직연금 시장 내 과당 경쟁을 일으키는 대기업의 `역 꺾기'에 대한 감독에도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검사 결과 퇴직연금과 무관한 상품이 제공된 경우 금융회사는 물론 기업도 검찰 통보 등을 통해 면밀한 조사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장기적으로 과당 경쟁의 피해가 퇴직연금 가입자들에게 돌아올 수 있는 만큼 소비자들의 자정 노력도 요구되고 있다.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자체적으로 협의회가 있지만, 은행, 증권, 보험 등 업종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르고 실적 경쟁에 내몰리고 있어 자체적인 정화 노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한국노동연구원 방하남 선임연구위원은 "당국이 공정한 규칙을 만들고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하겠지만, 뒷거래가 이뤄진 경우 파악이 쉽지 않고 법리적으로 연관성을 따지기도 복잡한 측면이 있다"며 "단기적으로 달콤한 사탕이 장기적으로는 결국 소비자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는 만큼 퇴직연금 소비자들이 정보를 교환해 자정 캠페인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성규 윤선희 최현석 이봉석 기자 sglee@yna.co.krindigo@yna.co.krharrison@yna.co.kranfour@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