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정치 재판' 비난도 한몫
러시아 "내정 간섭 말라…너희나 잘해라" 발끈

탈세 혐의로 복역 중인 러시아의 석유재벌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가 추가 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으면서 한때 몰락한 '올리가르흐(과두재벌)'로 평가받던 그가 '반체제 투사'의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다고 AP통신이 28일 보도했다.

한때 거대 석유기업 유코스 회장으로 러시아 최고의 갑부였던 호도르코프스키는 2003년 사기·탈세 등 혐의로 체포돼 8년 형을 선고받고 7년째 복역 중이다.

또 그는 유코스 자회사에서 2억t 이상의 석유를 훔쳐 판 혐의로 기소됐으며 모스크바 하모브니체스키 법원은 27일(현지시각) 이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검찰이 이미 14년의 징역형을 구형한 만큼 호도르코프스키는 앞으로 몇 년은 더 교도소에서 썩어야 하는 처지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일련의 처벌이 2003년 총선 전 푸틴 당시 대통령을 반대하는 야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데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해 왔다.

특히 그는 법정 진술뿐만 아니라 수필과 서한 등 출판물을 통해서도 이런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옛소련 스탈린 시절 수백만의 정치범들이 그러했듯, 시베리아 수용소에 갇힌 채 장갑 뜨개질 사역을 했고 쇠고랑을 찬 채 감방과 법정을 오갔다.

이 때문에 올해 47살인 그의 머리는 백발이 됐고 햇빛을 보지 못한 탓인지 얼굴은 매우 창백했다.

그러나 법정에 나온 그는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았고 이는 짧게 자른 머리와 강렬한 눈빛 등 그의 외모와 어우러져 반체제 투사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야당과 자유주의 성향 인사들은 호도르코프스키 투옥이 정치적 보복 성격이 강하다며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그의 지지자들은 법정 밖에서 '자유', '푸틴 없는 러시아' 등 피켓을 들고 석방 요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여기에 미국, 독일 등 서방이 이번 재판을 `정치적 재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반응을 내놓은 대목도 호도르코프스키의 반체제 이미지 구축에 한몫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호도르코프스키에 대한 이번 러시아 재판부의 판결에 대해 "선별기소의 문제점과 정치적 고려 때문에 법치가 무색해졌다"며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이번 판결이 국제적 인권 의무를 준수하고 투자 환경을 개선해 온 러시아의 명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클린턴 장관은 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현대화 계획을 환영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적법 절차와 사법부의 독립이 존중받는 환경이 요구된다"며 "우리는 이번 항소 과정을 지켜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귀도 베스터벨레 독일 외무장관도 "재판 상황이 매우 걱정스러울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근대화를 향한 과정의 후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서방의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일축하며 자기 일에나 신경 쓰라고 쏘아붙였다.

러시아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미국에선 이런 범죄라면 150년 형을 선고한다"면서 금융사기(폰지) 혐의로 150년형을 선고받은 버나드 메이도프 재판을 들며 호도르코프스키에 대한 처벌이 미국보다 덜 가혹하다고 반박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최근 발언을 되풀이했다.

이에 따라 호도르코프스키의 고난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차기 대선이 치러지는 2012년 이전에 호도르코프스키를 석방하면 그가 야당의 중심인물로 정국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만큼 현 정권이 이를 용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또 총리인 지금도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차기 대선 출마를 배제하지 않은 푸틴이 다시 2012년 대선을 통해 대통령직에 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