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만삭스를 사기 혐의로 연방법원에 제소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19개 월가 대형 금융사를 대상으로 분식회계 조사에 착수했다.

전후 최악의 금융위기에서 벗어난 만큼 월가 금융사의 회계 관행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꼼꼼하게 따져보겠다는 의지다. 월가 금융사들은 SEC가 회계 적정성을 따지기 위한 칼을 빼든 만큼 파장이 작지 않을 것이라며 긴장하고 있다.

메리 샤피로 SEC 위원장은 20일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원인과 진행 과정을 조사하는 하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 출석,"리먼브러더스의 몰락을 초래한 회계분식이 다른 대형 금융사에서도 행해졌는지 파악하기 위해 19개 금융사를 대상으로 정보를 수집 중"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샤피로 위원장은 금융사들이 분기 실적 발표를 앞두고 부채 규모를 일시적으로 줄이는 '꼼수'를 규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리먼이 동원한 분식회계 기법은 '리포(Repo) 105'다. '리포'는 '재구매 약정(Repurchase Agreement)'이라 불리는 거래로,금융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채권 등을 맡기고 단기로 자금을 빌리는 거래 형태다. 시장의 유동성을 보강해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거래 자체는 금융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를 회계 속임수로 활용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앤톤 발루카스 리먼 파산 진상 조사관(시카고 검사)이 지난달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3월 베어스턴스 파산으로 차입에 어려움을 겪게 된 리먼브러더스는 회사의 재정 상태를 보여주는 대차대조표를 조작하기 위해 '리포 105'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채권을 담보로 현금을 빌려오면서 마치 채권을 매각한 것처럼 회계 처리해 자산과 부채가 동시에 준 것처럼 투자자와 신용평가사를 오도했다. 리먼은 이런 식으로 특정 분기에 부채 규모를 490억달러가량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리먼이 대차대조표에 이 같은 거래 정보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등 회계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으로 해석했다.

2008년 2월 리먼의 고위 트레이더가 동료에게 보낸 이메일을 보면 리먼의 고위 임원들은 회계 조작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레이더는 이메일에서 "상황이 절망적"이라며 "'리포 105'를 활용하거나 직접적인 자산 매각을 통해 부채 20억달러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몇 달 후 이 트레이더는 또 다른 동료에게 "'리포 105'를 최대한 활용할 것"을 주문했다. 바트 백데이드 리먼 이사는 '리포 105'가 마약 같은 역할을 했다며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전했다. 내부적으로 경고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지만 리먼은 파산 전 '리포 105'를 활용해 연명해온 셈이다. 리먼은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부터 월가에서 '리포'시장의 강자로 알려졌다. 투자은행 순위는 5위지만 '리포'시장 점유율은 수위를 지켜왔다. 이 같은 '리포 105' 방식의 분식회계가 다른 대형 금융회사들에도 성행했는지 SEC가 정밀하게 조사하고 있다는 게 샤피로 위원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월가 금융사들은 SEC가 리먼이 주로 썼던 '리포 105'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리포 계약에 대해 조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자산을 담보로 한 차입인지 아니면 자산 매각인지를 명확하게 회계에 반영하지 않았을 경우 감독기관은 물론 투자자,신용평가사를 오도했다는 점에서 사기 혐의를 받게 된다. 일단 SEC가 회계 문제를 파고들면 복잡한 회계 난맥상이 줄줄이 드러나 곤욕을 치르는 곳이 적지 않을 것이란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골드만삭스 제소 이후 SEC 조사의 최종 목적지는 오바마 정부의 금융개혁안과 맞닿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뉴욕=이익원 특파원/박성완 기자 iklee@hankyung.com

●'리포(Repo) 105'=금융사들이 보유채권 등을 맡기고 단기자금을 빌리는 거래 형태다. 현금 100달러를 빌리는 데 최소 105달러 가치의 채권을 담보로 제공하기 때문에 105란 숫자가 붙었다. 리먼은 담보로 제공한 채권 가치가 차입한 금액의 105% 이상일 경우 이를 자산매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해석을 영국 법률회사에서 받아 '리포 105'를 활용해왔다. 리포는 만기가 되면 담보로 맡긴 채권을 되사야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리먼은 이를 또 다른 리포 거래를 통해 돌려 막는 방식으로 담보로 제공한 채권을 매각한 것처럼 위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