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환자에 대한 의사 책무는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것"

뉴질랜드에서 불치병을 앓고 있는 한 여성이 자살을 위해 요양원에서 열흘 넘게 음식을 거부하면서 윤리와 법적 차원의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이 여성의 전 남편은 당국이 강제로라도 환자를 병원에 입원시켜 음식물을 다시 섭취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전문가들은 대체로 단식 자살을 환자의 권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1991년 뇌출혈로 심각한 언어장애와 행동장애를 갖게 된 마거릿 페이지(60)는 25일 현재 웰링턴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약간의 물만 마시며 11일째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고 있다.

그는 정신과 의사들로부터 받은 몇 차례 감정에서 정신이 명료하다는 진단을 받았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의사도 분명히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페이지의 단식 소식이 알려지자 12년 전 이혼한 전 남편 배리 페이지는 자주 요양원을 찾아 전처 곁을 지키며 자살을 막기 위해 환자를 병원에 입원시켜 강제로라도 음식을 먹여야 한다고 당국에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요양원 측은 자신들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다며 이제는 오히려 호스피스까지 붙여주며 환자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의료계와 대부분의 법률 전문가들도 환자의 결정을 지지하고 있다.

전 남편을 제외한 가족들도 죽음을 위한 페이지의 단식 투쟁에 무언의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뉴질랜드 의사협회는 24일 이례적으로 이 문제와 관련해 의료계의 입장을 밝혔다.

의사협회 윤리위원회의 트리샤 브리스코 회장은 불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경우 의사의 책무는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 사실상 페이지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는 "환자의 정신이 말짱하다면 어떤 치료를 받을 것인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며 페이지의 행동은 의사의 책임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브리스코 회장은 이어 음식물 섭취는 치료수단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의사들의 의료행위에서도 당연히 제외된다며 의사는 어디까지나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지 죽지 못하게 막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건강법 전문가인 조너선 코츠 변호사도 인권법과 관습법은 환자가 음식물의 섭취는 물론이고 치료행위를 거부할 권리를 분명히 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족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심지어 의사와 보건 전문가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환자들의 권리는 마땅히 존중돼야한다"고 강조했다.

영국의 자살문제 전문가인 나브 카푸르 교수는 뉴질랜드가 환자들의 자결권 보장 측면에서 매우 뛰어난 정신 건강법을 갖고 있다며 그러나 자살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라고 말했다.

오클랜드의 세인 테이트 변호사는 의사가 이번 사건에 개입한다고 해도 유죄판결을 받게 될 가능성은 작다며 "그런 상황에서 의사에게 유죄평결을 내릴 수 있는 배심원이 있다면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 사실상 자살방지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그는 이어 페이지에게 강제로 음식물을 먹인다면 기술적으로는 공격행위가 되지만 자살 기도를 막기 위해 개입했다면 의사들도 얼마든지 법률적 보호 장치를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신 건강법 전문가인 존 도슨 오타고대학 교수는 자살을 막기 위해 적절한 힘을 동원할 수 있다는 형법 조항은 빌딩에서 뛰어내리려는 경우 등 긴급 상황에 적용되는 것이지 페이지의 경우는 긴급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사람이 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인권법에 분명히 보장돼 있는 법률적 권리로, 자살은 범죄도, 불법행위도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클랜드<뉴질랜드연합뉴스) 고한성 통신원 ko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