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 20∼30m 강풍 속 막바지 조사

8일(이하 현지시각) 남극대륙 동부에 위치한 테라노바베이(Terra Nova Bay) 상공.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AS-350 헬리콥터의 경쾌한 소리를 배경음 삼아 내려다본 테라노바베이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라온호에서 이륙하자마자 바다를 향해 혓바닥처럼 늘어진 수백 ㎞ 길이의 캠벨 빙하의 끝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륙의 높은 지대에서 수천년간 쌓인 눈과 얼음이 서서히 밀려나와 바다로 나가는 모습은 수천 혹은 수만년일지 모를 남극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았다.

곧이어 캠벨 빙하의 오른편에 만년설을 뒤집어쓴 해발 2천732m의 멜버른 산이 나타났다.

30여㎞ 이상 떨어져 있지만, 공기가 맑아 바로 앞에 있는 듯 느껴졌다.

활동주기가 긴 활화산인 멜버른 산 주위엔 나지막한 기생화산도 눈에 들어왔다.

순백의 멜버른 산을 바라보며 남극의 정취에 취할 무렵 헬리콥터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브라우닝 산의 능선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100여년 전 스콧의 남극탐험대가 테라노바호를 타고 와 상륙했던 그곳에서 23명의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남극대륙기지후보지정밀조사단(이하 조사단)이 기지 건설부지로서의 요건을 따져보고 있었다.

맨땅이 드러난 곳이 전체 면적의 2% 남짓밖에 안 된다는 남극대륙에서 과학연구기지 건설에 적합한 땅을 찾기는 애초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미 수십년 전부터 진행돼온 선진국 간 남극 대륙기지 건설 경쟁으로 이른바 노른자위 땅은 남의 차지가 돼버린 상황.
남극 대륙 전역에 20개국이 40여개의 과학연구기지를 건설해 운영하고 있다.

선진국들이 앞다퉈 남극에 기지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것은 과학연구 목적뿐 아니라 내심 남극 대륙의 영토나 자원을 선점하기 위한 포석도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1년전 예비조사를 통해 조사단이 기지건설후보지로 점찍어 뒀던 독일 곤드와나 하계기지 인근의 터는 올해 스쿠아의 집단번식지가 돼 있었다.

조사단은 테라노바베이에 도착한 첫날 정찰을 통해 종전 후보지보다 500여m 떨어진 곳에서 대안지를 찾아 분야별 조사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조사대상은 건설환경, 상수원, 생물상, 지질, 대기환경ㆍ기상분석, 빙상 등의 분야.
기자가 먼저 따라나선 이는 생물상조사를 맡은 극지연구소 김지희 박사다.

지난 이틀간 눈이 많이 내려 20∼50㎝씩 발이 푹푹 빠지는 능선을 올라가며 암석에 붙어사는 지의류를 관찰하고 스쿠아의 개체수와 둥지의 위치를 기록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무거운 장비를 메고 한시간 반 남짓의 눈쌓인 언덕을 오르내렸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이어 기상 분야를 맡은 최태진 박사와 네오시텍의 함석현 사장을 찾았다.

위성전화망을 통해 기온과 풍향, 풍속 등의 기상정보를 자동으로 전송해 주는 자동기상관측기를 조립해 설치한 뒤 강풍에 쓰러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두 팀의 조사작업에 대한 취재가 끝날 무렵 아라온호에서 헬기로 공수한 주먹밥과 된장국이 도착했다.

기자는 조사단원들과 함께 거대한 빙하를 병풍 삼아 소박하지만 운치있는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잠깐의 꿀맛 같은 휴식이 끝난 뒤, 지도제작분야를 담당한 손호웅 배재대 교수팀을 찾아봤다.

1㎞쯤 돼 보이는 거리에서 묵묵히 설상용 궤도차량을 몰고 주요 포인트를 오가며 3차원 광대역 스캔 시스템을 사용해 지형도 제작에 필요한 기초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다.

지질조사를 맡은 건설환경기술연구원 김영석 박사팀은 기지 건물을 지을 후보지에서 특수장비를 이용해 지질 특성을 파악ㆍ기록하고 지반의 안정성을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른 팀들도 각자 맡은 영역의 조사를 수행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비지땀을 쏟아냈다.

오후 5시쯤이었을까.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모래 같은 눈 알갱이들이 초속 20∼30m의 강풍에 날려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고, 간혹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몰아치기도 했다.

심지어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순간 아라온호로부터 조사단 전원철수를 지시하는 긴급 무전이 날아왔다.

눈보라를 피해 이동용 이글루(비상대피용 가건물) 안에서 몸을 녹이던 조사단원들은 4명씩 팀을 이뤄 헬기를 타고 귀환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잠잠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글루 밖을 나가봤더니 산 중턱에서 상수원 조사를 하던 이주한 박사와 그를 취재하던 취재팀이 흩어지지 않기 위해 굴비처럼 서로의 몸을 로프로 묶고 오는 웃지못할 일이 생기기도 했다.

긴박한 순간을 넘긴 이주한 박사는 이글루 안에서 "해안가에서 1.5㎞ 떨어진 해발 85m 지점에서 폭 100m, 수심 5∼6m의 담수호를 발견해 상수원 존재를 확인했다"고 전하며 기뻐하기도 했다.

강풍이 간헐적으로 계속됐지만 헬리콥터는 위험을 감수하고 아라온호와 후보지를 왕복하며 열심히 조사단원들을 실어 날랐다.

기자가 헬리콥터에 탑승하기 전, 조사단을 총괄하는 정경호 박사는 "보셨다시피 추위를 비롯해 가혹한 환경에서도 하루 12시간 강행군으로 조사완료를 눈앞에 두고 있다"며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머잖아 케이프 벅스나 테라노바베이에 기지가 들어서면 빙하나 천문대기, 기후변화 분야 연구의 새 장을 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몸을 사리지 않는 조사단의 활동을 지켜보며 대한민국 남극연구, 나아가 극지연구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한편, 조사단은 케이프 벅스와 테라노바베이 지역의 조사결과를 오는 3∼4월 정부에 보고하고 국제사회의 동의를 얻어 기지건설에 착수할 예정이다.

이르면 2012년께 한국의 첫 남극대륙기지 건설의 첫삽을 뜨게 될 전망이다.

'박지호의 남극일기'

(테라노바베이<동남극>연합뉴스) 박지호 특파원 jihopar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