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악재가 중첩되고 금융시장의 불안이 계속되면서 '위기론'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최근의 위기론은 '환란의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이러다가 외환위기가 다시 도래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제전문가들은 대기업의 차입 경영이나 금융기관의 부실이 환란 당시에 비해 크게 개선됐고 국가의 채무상환 능력도 안정적인 상태라는 점에서 최근의 위기론은 과장된 측면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2일 오전 국회 경제정책포럼에서 우리 경제가 어렵기는 하지만 환란때와는 다르다고 단언했다.

그렇다고 안심할 때는 아니다.

금융기관들의 장기 차입이 어려워지고 있고, 경상수지 적자가 개선되지 않고 있으며, 환율이 뛰고, 주가가 추락하는 상황은 외환위기 당시와 흐름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 대외여건.금융시장은 불안

외환위기가 시작됐던 1997년 말 당시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선진국 경제가 장기호황을 누리고 있었던 만큼 한국 경제는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대외여건은 당시보다 악화됐다.

미국 모기지업체의 부실 등으로 인해 글로벌 신용경색이 진행되고 있다.

달러 약세와 고유가로 인해 물가는 오르고 경기는 둔화되는 스태그플레이션 압력도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성장률은 오는 4분기에는 0%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최근 몇 년 동안 두자릿 수의 성장률로 고속 질주해왔던 중국 경제도 내년에는 성장률이 한자릿 수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일본 경제 역시 휘청거리고 있으며 유럽 경제의 2분기 성장률도 1999년 유로화 도입 이래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할 전망이다.

국내 실물.금융시장도 1997년 당시에 비해서는 양호하지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97년 당시에도 경기는 하강국면이었고 경상수지 적자는 4년연속 지속되면서 누적 적자가 440억달러에 이르렀다.

올들어 경기선행지와 동행지수는 6개월째 하락했고 경상수지는 계속 적자상태를 유지해 7월까지 누적규모가 78억달러에 이르렀다.

또 외국인 증시 투자자금이 이탈하면서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고 시장금리가 상승하고 있는 것도 환란 당시와 비슷하다.

당시의 원.달러 환율은 1996년말 843.60, 6월말 887.90, 9월말 914.30, 12월말 1.695.30 등이었다.

최근에는 작년말 936.10, 6월말 1.046.30, 9월1일 1.116.00 등이었다.

◇ 기업체 차입 경영.은행 건전성 개선

일부 대기업의 자금난이 문제가 되고 있긴 하지만 환란의 빌미를 제공했던 대기업의 무리한 차입 경영과 금융기관의 부실 문제는 개선된 것으로 평가된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중화학공업 업체들이 차입에 의존해 중복투자를 늘리면서 설비투자의 효율성과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됐다.

이로 인해 대기업의 연쇄부도로 은행의 부실자산이 급격히 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우량기업을 중심으로 기업의 부채비율이 꾸준히 낮아졌다.

기업의 부채비율은 1997년 424%에 달했지만 올해 1분기에는 92.5%로 떨어졌다.

금융기관의 자본적정성과 건전성도 향상됐다.

은행의 고정이하여신비율은 1996년말 2.7%에서 지난해 1.0% 밑으로 떨어졌고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1997년 7.0%에서 지난해 11~12% 수준으로 높아졌다.

다만 가계 당 부채가 지난해말 3천842만원에 달하는 등 주택담보대출을 중심으로 가계신용이 급증했고 저축은행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등의 연체율이 높아지고 있는 등 일부 잠재적인 위험 요인들이 있는 상황이다.

이성태 한은 총재는 가계대출과 PF 대출 등이 경제에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다고 걱정했다.

국내 은행들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장기 차입이 어려워지면서 외채의 단기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되고 있다.

◇ 국가 대외채무 능력 `안정적'
국가의 대외채무 상환능력도 전반적으로는 안정적인 수준이다.

만기가 1년 이내인 단기외채가 97년 4분기 약 638억달러에서 올해 2분기 1천757억달러로 3배 가까이 급증했지만 같은 기간 외환보유액이 204억달러에서 2천581억달러도 10배 이상 늘면서 실질적인 채무부담 능력이 개선됐다.

올해 들어 경상수지가 적자행진을 이어가고 있고 환율 급등에 따른 외환당국의 시장개입으로 외환보유액이 감소세를 보이고 있지만 절대 규모 자체가 커 외환위기 때와는 비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외환보유액은 4월부터 5개월 연속 감소했지만 7월말 현재 2천432억달러로 여전히 세계 6위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국가 신용등급도 안정적인 편이다.

세계적인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97년 우리나라의 국가 신용등급을 `A1'에서 투자부적격 등급인 `Ba1'로 인하했지만 현재는 안정적인 `A2' 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 경제전문가들 "위기상황 아니다"
경제전문가들은 외환위기와 같은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외환위기와 비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리가 있다"며 "세계 금융시장의 불안 등으로 일부 거시경제 차원에서 여건이 악화되고 있지만 금융위기 또는 외환위기로 연결할 상황은 전혀 아니다"고 못박았다.

오문석 LG경제연구원 상무는 "고유가, 글로벌 신용경색 등 대외충격에 취약한 경제구조에 대한 우려가 있다"면서도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율, 금융기관의 부실 정도, 기업들의 대출 상환 능력 등 외환위기를 촉발한 요인들을 감안할 때 외환위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오 상무는 "단순히 외환위기가 되풀이된다는 시각보다는 현재 금융시장이 어려움을 겪는 근본원인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무디스의 토마스 번 국가신용담당 부사장은 "한국 기업과 은행들은 1997년 당시보다 훨씬 재정적으로 건전하다"면서 "수출기업들은 세계경기 둔화에도 잘 견디고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이준서 기자 keunyou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