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용 삼성전자 상임고문(64)을 만난 것은 지난 11일 서울 태평로빌딩 9층에 있는 집무실에서였다. "경영 현장을 떠난 사람이 바쁠 일이 뭐가 있겠나"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는 한 시간 단위로 빽빽이 일정을 잡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 5월14일 삼성전자 총괄 부회장에서 물러난 지 3개월.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기는 했지만 그의 열정은 여전했다.

인터뷰를 앞두고 한국경제신문이 2002년 펴낸 'Samsung Rising-삼성전자 왜 강한가'를 통독했다는 그는 삼성그룹을 대표했던 전문 경영인답게 모든 주제에 막힘이 없었다.

해박한 역사지식으로 건국 60년을 맞은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짚었고,오랜 최고경영자(CEO) 경험을 토대로 전자산업의 미래를 진단했다. 이건희 회장 퇴진 이후 각사 독립경영 체제로 재편된 삼성그룹의 후배 경영인들에게도 애정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올해로 건국 60년을 맞았습니다.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지난 60년간 우리나라는 질적,양적으로 대단한 발전을 이뤘습니다. 1960년대 농경사회에서 시작해 산업사회,지식정보사회 진입을 한 세대 만에 이뤄낼 정도였습니다.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산업화를 가장 먼저 이룬 영국도 지식정보사회로 진입하는 데 100년이 훨씬 더 걸린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취입니다. 세계 역사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죠.베이징 올림픽만 봐도 그렇습니다. 성적이 인구에 비례한다면 우리나라는 올림픽에서 세계 25등에 그쳐야 하는데 대회 사흘째까지 2등을 했지 않습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기초가 튼튼해졌다는 것입니다. 선진국이 독점했던 수영(400m 자유형)에서 박태환 선수가 우승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비단 스포츠뿐 아니라 경제,사회 등 모든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우리에겐 정말 중요한 시기죠."

―그런데 우리 경제의 성장동력이 점점 꺼져가고 있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맞습니다. 성장속도가 급격히 낮아지고 있어요. 무엇보다 지나치게 이념에 치우친 사회 풍토가 문제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국민소득 2만달러를 올리는 국가가 이념 때문에 성장이 정체된 사례는 찾아볼 수 없어요. 지금까지 우리 경제를 성장시켜 온 게 기업가 정신인데,이게 부정되고 있어요. 더 이상 이념에 치우쳐 과거에 잘했던 일까지 폄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경제발전을 통해 먹거리를 만들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입니다. 국민들이 바라는 것도 이것입니다. 가끔 '우리나라가 대단한 저력을 갖고 있음에도 이념 때문에 주저앉지나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답답해집니다. "

―그런 점에서 삼성 반도체 신화는 기업가 정신의 좋은 본보기일 것 같습니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게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는 우리 그룹 상황이 어려워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여력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건희 회장(당시 중앙일보 이사)이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죠.다들 안 된다고 했지만 이 회장은 반도체가 유망한 산업이라고 판단했던 거죠.1983년 이병철 회장이 메모리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했을 때도 처음엔 모두가 황당해 했어요. 사람,돈,기술 뭐 하나 가진 게 없었으니까. 물론 나중에 일본을 추월했지만 그 당시엔 이병철 회장의 결정이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죠.다들 반도체 때문에 그룹이 망한다고 했을 때였으니까요. "

―결과적으로 삼성은 1992년부터 일본을 앞질러 반도체 최강자가 됐습니다. 비결은 무엇이었나요.

"우리가 일본보다 경영 스피드가 빨랐어요. 그때 우리는 의사결정은 물론 건설,양산까지 모든 면에서 시간을 단축하려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일본 기업들보다 한 발 앞선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었어요. "

―삼성식 의사결정 구조가 일본 기업들보다 효율적이었다는 얘기인가요.

"당시 일본 기업 CEO들은 대부분 3년 임기의 전문경영인이기 때문에 '리스크 테이킹'(위험 감수)을 하려 들지 않았어요. 그럴 필요성을 아예 못 느낀 거죠.반면 이건희 회장은 정말 과감하게 투자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서라면 기술이나 공정을 한 단계 건너뛰는 등 위험 부담이 큰 결정도 마다하지 않았죠."

―이건희 회장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이후 독립경영 체제로 바뀌면서 삼성의 경쟁력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일상적인 경영은 앞으로도 각사 전문경영인들이 잘 유지해 나갈 것입니다. 문제는 바이오,반도체와 같은 신사업을 추진할 때입니다. 각사 전문경영인들이 과거 일본 기업 CEO들처럼 '리스크 테이킹'을 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 사업을 자기만 하겠다고 나설 경우 업무 조정의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전처럼 그룹 차원의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가 힘들어질 것이란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삼성을 비롯해 한국의 기업들이 오늘의 세계적 경쟁력을 일군 것은 무엇보다도 총수들의 과감한 결단의 리더십이었습니다. 과거 이병철 회장이 미래를 내다보고 반도체,조선 등에 진출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모두가 우려했지만 지금 보면 모든 게 성공했어요. 건설 사업에 진출할 때도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비판도 많았지만 지금은 아랍에미리트의 '버즈 두바이',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KLCC타워 등 세계 최고층 빌딩을 지을 정도가 됐습니다. 앞으로도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결단이 중요한데 독립경영 체제에서도 가능할지 걱정입니다. "

―한국 전자산업을 42년간 이끌었는데,전자산업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어떤 산업이든 영속적으로 성장하는 산업은 없습니다. 다음 주력 산업이 나타나면 주도권을 넘겨줘야 하죠.그런데 주도권을 넘겨준다고 기존 산업이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산업혁명 초기 핵심 산업이었던 방직산업이 지금 많이 쇠락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전자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재생 에너지나 바이오ㆍ환경 등에 주도권을 넘겨줄지도 모르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아요. 태양광 발전,바이오 사업이 전자산업의 도움 없이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미래 전자산업은 이처럼 모습은 바뀌겠지만 환경,에너지 등 차세대 주력 산업의 뼈대 역할을 할 것입니다. "

―제2,제3의 반도체ㆍ철강신화를 이루기 위해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 현실을 보면 규제가 너무 많습니다. 수도권에 공장을 짓거나 투자를 제한하는 등 법률 규제도 많지만 예규나 고시 등의 이중 삼중 규제도 많아요. 정부가 이걸 없애줘야 합니다. 또 전자소재와 부품 관련 중소기업이 경쟁력이 없다는 지적이 많은데 이런 산업이 잘 되기 위해서는 많은 돈과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정부가 말로만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얘기할 게 아니라 간접적인 세(稅) 지원 등으로 중소기업을 도와줘야 합니다. "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조만간 해외 순회근무를 떠날 예정입니다. 이 전무의 경영 멘토(mentor)를 맡아오셨는데,경영 능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이 전무는 정말 열심히 합니다. 머리도 뛰어난 데다 조직을 넓고 깊게 보려고 많은 노력도 합니다. 무엇보다 행동도 겸손해요. 앞으로도 계속 현장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아가는 게 이 전무에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

정리=이태명/김현예 기자 chihiro@hankyung.com
사진=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