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불법승계 및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불구속기소된 이건희(66) 전 삼성그룹 회장은 13년만에 법정에 `피고인'으로 앉았으나 차분한 자세로 재판에 임했다.

12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민병훈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첫 공판에서 이 전 회장은 이완수 변호사만을 동반하고 공판 시작 10여분 전에 법정에 들어섰다.

김인주 전 사장 등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피고인과 변호인은 모두 일어나 이 전 회장을 맞았고, 그는 현명관 전 비서실장의 몸을 가볍게 두드리며 인사한 뒤 피고인석 두번째 자리에 앉아 미리 준비된 자료를 읽으며 말없이 재판의 시작을 기다렸다.

공판이 시작되자 이 전 회장은 재판부의 인정신문에 자신의 성명을 말하며 처음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는 주민번호를 말하라는 지시에 숫자를 한자리씩 나열하는 통상적인 방법 대신 앞 6자리는 "42년생 1월9일"이라고 말했고 뒤의 7자리는 4자리와 3자리로 각각 끊어 읽었다.

특검이 공소사실을 낭독하는 동안 이 전 회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경청했으며 이어 변호인의 모두진술이 길어지자 피곤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앞쪽으로 살짝 기울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어진 피고인 모두진술에서 그는 "모든 책임을 제가 다 지겠습니다"라며 몸을 낮췄으나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은 실무자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사실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해 공판의 쟁점에서 살짝 비켜서려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이 전 부회장과 김 전 사장 등 다른 피고인들도 하나같이 각자의 책임을 언급하며 "죄송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재판부는 `삼성 에버랜드 주주 구성 변동' 등 미리 준비한 도표를 스크린과 대형 모니터로 제시하며 양측의 입장 차를 재확인하고 쟁점을 판단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날 공판에서는 앞서 5차례 열린 공판준비기일에 출석하지 않았던 조준웅 특별검사가 직접 나와 공소장을 낭독했고 높은 사회적 관심을 반영하듯 방청객 200여명이 몰려 법정을 가득 채웠다.

이 전 회장을 대신해 삼성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을 비롯해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측 인사 다수가 재판을 지켜봤고 시민단체 관계자들도 방청했다.

(서울연합뉴스) 백나리 이세원 기자 nari@yna.co.krsewon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