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 한국정치학회장ㆍ한국외국어대 교수 >

유권자의 준엄한 심판이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한 달여 만에 치러진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민들은 분명한 메시지를 정치권에 보냈다.

공천의 불협화음과 탈당,그리고 돈 선거의 망령까지 되살아나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는 것이 아닌지 우려했지만 국민들은 냉철한 판단으로 황금 분할의 의석 분포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어느 정당이나 정치 세력에게도 과도한 의석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완전히 기회를 박탈한 것이 아닌 절묘한 민심의 표출이었다.

앞으로 정치권이 어떻게 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민심을 제대로 읽어 성실하게 실천하는 정치 세력은 언제나 재기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도 전했다.

이러한 유권자의 메시지를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해 오만과 편견의 덫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정치권은 매사에 신중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한나라당은 153석의 의미를 찬찬히 살펴야 한다.

4년 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얻은 의석보다 한 석이 많다.

당시 탄핵 정국에서 유권자들이 보여 준 그 메시지를 열린우리당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그 결과 이후 5년의 국정이 어떻게 꾸려져 왔는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과반을 간신히 확보한 의석엔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앞으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겠다는 경고가 공존한다.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이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임에 틀림없어 이를 위해 총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국회의 과반 의석을 마련해 주었으나 독선과 밀어붙이기로 일을 그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다.

결국 이러한 경고의 메시지는 이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경제 살리기를 위해 추진하고 싶은 정책이 산적해 있을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정책 방향을 되돌려 새로운 정책 기조를 세우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압도적인 표 차로 대통령이 됐으니 지지자들에 대한 책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 나타난 민의(民意)는 새로운 정책 추진이 무리하게 진행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야당의 존재는 물론 한나라당 내부의 분파성,친박연대와 무소속의 현실적 존재가 이를 대변한다.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 지도부가 앞으로 어떠한 리더십을 보여 주는가가 정국 안정의 핵심이다.

대화와 타협,공존과 통합의 길을 택할지,갈등과 정쟁,독단과 아집의 길로 나설지 두고 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유권자들의 소리 없는 감시와 날카로운 판단이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밀어붙이기로 일을 도모하던 한나라당 내 몇몇 대통령 측근 유력 후보들이 지역구에서 낙선하고 말지 않았는가.

통합민주당 역시 유권자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되씹어 보아야 한다.

이번 총선은 넉 달 전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노무현 정부 5년에 대한 심판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도 국민들은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의 독주를 막아야 하는 임무를 통합민주당에 부여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준 셈이다.

목표였던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제1야당으로서 국회 운영의 한 몫을 차지했으니 책임 있는 정당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범 보수의 틈바구니에서 빛을 발하려면 몸싸움과 발목 잡기가 아니라 논리와 이성적 호소로 견제해야 한다.

야당의 한 축으로 등장한 자유선진당 역시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참 보수'의 이미지는 퇴색하고 충청 지역당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에 대한 자성(自省)이 필요하다.

'참 보수'의 외연을 넓히지 못하고 지역에 묶여 있노라면 원내 교섭단체 구성은 요원할 뿐이다.

민주노동당이 다섯 석의 의석을 차지하고 창조한국당이 원내 교두보를 마련한 것에 대해 진보 진영은 유권자의 뜻을 겸허하게 헤아려야 한다.

국민들은 구체적 정책 프로그램 없는 시위와 구호만의 진보 정당에 실망하고 있지만 동시에 진정 우리 사회 소외 계층을 위한 정치 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국민의 마음 속에 살아 숨쉬는 정치 세력으로 되살아나기 위해서 진보 정당들은 서민의 삶에 더욱 다가서야 한다.

총선 결과에 나타난 유권자의 중요한 메시지가 또 하나 있다.

46%라는 사상 최저의 투표율이다.

54%의 유권자를 투표소로 이끌지 못한 책임을 정치권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유권자를 결코 두둔할 생각은 없다.

일상의 삶이 힘들고,투표의 효용성이 떨어져 투표장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정치권의 행태가 보기 싫어 외면하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민주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무책임한 태도다.

앞으로 18대 국회에서 299명의 국회의원과 정당들이 어떠한 각오로 의정 활동에 임해야 할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결국 신뢰 회복이다.

국내 한 연구기관의 신뢰 수준 조사에 의하면 14개 대상 중 정부,정당,국회가 12위,13위,14위를 차지해 정치권이 불신 대상의 선두에 있음을 확인했다.

파행의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는 정치인들의 말 뒤집기와 언행 불일치로 점철됐다.

정당의 부단한 부침(浮沈)과 철새 국회의원들의 무분별한 이합집산,정경 유착에 의한 부패는 정치를 불신 속에 빠뜨려 버렸다.

18대 국회는 의사 결정의 투명성 확보로 신뢰를 구축해 마음이 떠난 54%의 국민들에게 정치 참여를 호소해야 한다.

특히 18대 국회는 헌정 60년을 맞는 국회임을 인식해야 한다.

지난 60년간의 헌정사에서 국회가 어떠한 위상을 지녀 왔는지,어떠한 역할을 해 왔는지 냉철하게 짚어 보고 그러한 인식하에 18대 국회는 단순히 17대 국회를 이어가는 국회가 아니라 지난 60년을 관통하는 역사성을 이어받는,더 나아가 역사성을 극복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국회로 발전해야 한다.

총선은 끝났다.

그러나 정치는 계속된다.

우리나라 정치는 질곡과 파행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부단한 인내로 민주 정치를 이뤄 왔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총선 후보로 나섰던 사람들,당선자와 낙선자들,정당과 유권자 모두 조용히 반성의 시간을 갖자.이번 총선에서 나는 누구였는지,무엇을 위해 뛰었는지,제대로 역할을 했는지,그것이 우리나라 정치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