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활 14년차 '수전 델로지어'의 갤러리 나들이

"인사동 동숭동 삼청동은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거리입니다.

이곳에 가면 항상 만날 수 있는 전시회들은 서울에서 가장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곳을 바로 옆에 두고서도 막상 서울사람들은 너무 바빠 즐길 여유가 없는 것 같아 너무 아쉽습니다."

올해로 한국생활을 한 지 14년째인 수전 델로지어씨(Susan Delozier·56)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이들 거리 중 한 곳을 찾는다.

그는 골목 사이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갤러리에 들어가 한국 화가나 조각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일주일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지난 5일에도 그는 인사동 거리를 지나다 박헌열 서울시립대 교수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는 노암갤러리에 들어가 봤다.

때마침 그날의 전시회가 마무리되면서 한산한 분위기라 박 교수한테 직접 작품에 대한 설명까지 들어볼 수 있었다.

홍익대를 나와 이탈리아에서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하다가 서울시립대에 자리잡은 박 교수는 이번 전시회에서 '자연과 생명'이라는 주제로 인체와 자연의 대비와 조화를 통해 '만물은 결국 하나'라고 말한다.

델로지어씨는 박 교수에게 "어디서 영감을 얻어 조각을 하는지" 진지하게 묻는다. 박 교수도 진지해진다.

"생활 일상에서 뇌리를 스치는 느낌들이 많지만 느낌을 스스로 만족스럽게 마음속에서 형상화하는 것이 힘들다"면서 "일단 형상화를 하고나면 작품화하는 데는 능한 편"이라면서 "이번엔 우주적 관점,몰아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 사이에 경계가 없다는 것을 쉽게 전달하는 데 역점을 뒀다"고 설명한다. 델로지어씨는 "쉬우면서도 심오한 게 좋은 예술"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그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미국 작가들의 작품과는 느낌이 다르다고 말했다.

"미국은 역사가 짧기 때문인지 예술작품에 담긴 느낌도 도전적이고 화려한 반면 한국 작품에는 굽이굽이 긴 역사가 녹아 들어 있는 것 같다"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작가의 작품 스타일은 정적인 가운데 미세한 움직임들의 느낌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작품마다 특성이 다르긴 하지만 한국작가들은 공통적으로 정적인 느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또 동양과 서양의 요소들이 작품 속에 함께 담겨있는 점도 한국 작품의 특징이요 매력이라고 말했다.

대학원 졸업 후 미국 조지아주 테네시에서 중학생들의 영어를 가르치던 델로지어씨는 마흔이 다가오면서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교내 게시판에 서울에서 일할 영어교사를 찾는다는 구인광고를 봤다.

"이거다라는 느낌이 왔어요.

그때까지 한국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한국전쟁 정도밖에 없었지만 반드시 가야겠다는 생각이 단숨에 들었어요. 그게 인연인가 보지요…."

그는 한국에 너무 오고 싶은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지원하지 못하게 게시판에 있던 광고를 뜯어 버렸다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해서 1993년 한국에 온 델로지어씨는 지금까지 용산미군기지에 있는 중학교에서 영어와 아시아 문학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한국에서 14년을 보내다 보니 지금은 미술작품 전시회뿐만 아니라 한국 뮤지컬,음악 공연,도자기 전시회 등도 찾아다닐 정도로 한국예술 마니아가 되었다.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 나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차츰 기회가 늘어났다.

가장 친한 친구는 헤어디자이너 박준씨의 부인인 임승애씨.델로지어씨는 1997년 미국여성클럽에 메이크업 강연을 온 임씨와 처음 만났다.

그는 이날 인터뷰에 함께 나온 임씨를 자신의 친자매와 같다고 소개했다.

그는 "영어를 잘하는 임씨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진짜 한국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면서 "임씨와 함께 다닌 전시회와 공연이 100회가 넘는다"고 말했다.

델로지어씨는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자신의 인생이 너무 단조로웠을 것이라면서 "지금 생각해도 14년 전 결정은 너무 멋진 결정이었다"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서울처럼 과거와 현재,예술과 과학,전통과 첨단이 모두 교차하는 곳이 세계 어디에 더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한국에 이렇게 오래 살았어도 외출할 때마다 깜짝 놀라게 하는 문화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면서 요술 같은 나라라고 감탄했다. "몇 년 전인가 한번은 삼청동거리를 걷다가 한 전시회에 갔는데 남근상 조각 전시회여서 깜짝 놀랐어요.

나무나 돌을 깎아서 만들기도 했고 도자기처럼 진흙을 구워서 만든 것도 있었죠.성에 대해 굉장히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사회에서 이런 면도 있다는 것에 놀랐던 거죠."

그녀는 "한국에서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국예술 전시회에서 한글로만 작품 이름과 해설이 돼 있어 작가나 관계자에게 작품의 의미를 물어보지 않고는 외국인은 알 수 없다는 점"라고 말했다.

황경남 기자 knh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