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13일.이건희 회장은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밴플리트 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랜 해외 체류 끝에 귀국한 지 7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모두들 이 회장의 출장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예측은 빗나갔다.

밴플리트 상을 받은 직후 뉴욕에서 시작된 이 회장의 해외 출장은 무려 40일간 진행됐다.

뉴욕 런던 두바이 요코하마를 잇따라 방문하면서 이 회장은 '창조 경영'이란 새 화두를 던졌다.

뉴욕에서는 전자계열 사장들에게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할 창의적 제품을 내놓을 것"을 주문했고 런던에서는 첼시 구단을 본받으라고 지적했다.

또 두바이에서는 세이크 모하메드 총리의 창의적인 도시 개조를 배울 것을,요코하마에선 반도체 휴대폰에 이어 디스플레이도 글로벌 톱으로 키울 것을 강조했다.


각기 다른 장소와 사례를 통해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지금과 같은 모습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1993년 68일간에 걸쳐 해외 사업장을 점검한 끝에 '신경영'을 선언했던 것과 흡사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 회장의 말 속에는 신경영 선언 때보다 더한 위기감과 고민이 배어 있었다.

이 회장의 이 같은 고민은 1년여 전부터 시작됐다.

지난해 신년사에서 이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삼성은 오랫동안 선진 기업을 뒤쫓아 왔지만 지금은 쫓기는 입장에 서 있다"면서 "앞선 자를 뒤따르던 쉬운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두에서 험난한 여정을 걸어야 한다"고 밝혔다.

과거 별 볼 일 없는 전자업체에서 일본 업체들의 기술을 모방해 선두에 올라선 삼성이지만 더 이상 안심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만큼 현재 삼성이 처한 위기가 예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심각한 상황이라는 게 이 회장의 진단이다.

실제 삼성은 2004년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린 이후 줄곧 성장세가 정체되고 있다.

지난해 매출 141조원으로 13조5000억원을 올린 1987년에 비해 10배 이상 늘었지만 최근 3년간은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상황도 좋지만은 않다.

반도체가 그나마 수익을 내고 있을 뿐 휴대폰 사업부는 노키아 모토로라 등 글로벌 기업들과의 격차를 좀처럼 줄이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사업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 인텔과 마이크론,일본 도시바와 엘피다 등 경쟁 업체들이 일제히 '삼성 타도'를 외치며 거세게 추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도 지지부진이다.

반도체에 이은 신수종 사업으로 육성하고 있는 LCD 사업이 대표적.3년 연속 1조원가량 투자했지만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성장동력 약화와 함께 삼성이 안고 있는 문제는 또 있다.

59개 계열사에 임직원 수만도 25만명에 달하는 거대 조직으로 발전하면서 '동맥 경화' 증세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

"그룹 규모가 커짐에 따라 각 계열사 간에 유기적인 협력보다는 '불협화음'을 빚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고 있고 과거와 같은 '톱 다운' 방식의 일사불란한 의사 전달이 안 되고 있다"는 우려다.

덧붙여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임직원들의 의식이나 관행이 이를 받쳐 주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자칫 그룹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할 수 있는 문제점들이다.

이 회장이 "영원한 1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삼성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만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정상의 발치에서 주저앉을 수 있다"(2007년 신년사)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예년처럼 했다가는 어렵다"(사장단 신년 만찬)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창조 경영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대증 요법이면서 삼성의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이 회장은 창조 경영을 실천할 전략 지침으로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신기술 개발 △이를 뒷받침할 핵심인재 발굴 △인재와 기술 개발을 주도할 새로운 경영체제 수립 등을 들었다.

과거 20년을 돌아볼 때 이 회장의 리더십은 위기에서 더욱 빛났다.

올해 신년사에서도 위기 의식을 강조하는 동시에 헤쳐나갈 수 있다는 이 회장의 의지가 엿보인다.

"지금부터 20년 전 회장에 취임하면서 위대한 내일을 창조할 삼성의 가능성을 확신했다.

미래에 대한 도전과 열정,혁신과 도전이 계속되는 한 삼성의 앞날은 더욱 밝을 것이다."

특별취재팀=조일훈·이태명·유창재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