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시설청 담합비리 수사 여하에 따라서는 고이즈미(小泉) 총리가 임기 전에 물러날 가능성도 없지 않다."(자민당 중견의원 비서관) 황실전범 개정안 제출 단념, 방위청의 성(省)승격법안 제출 보류 등 정기국회에서 일본 집권 자민당이 시종 수세에 몰리자 고이즈미 정권의 정국 구심력 약화가 다시 일본 정계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자민당이 이번 국회 통과를 별렀던 개헌 국민투표법안과 교육기본법 개정안도 통과를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고이즈미 총리가 후계자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을 의중에 두고 있음을 너무 일찍 내비치는 바람에 반대파의 결속을 불러 레임덕을 자초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 고이즈미 정권 '역풍' 계속 내진설계위조, 라이브도어 파문, 미국산 수입쇠고기 문제, 방위시설청 담합비리는 고이즈미 정권을 곤혼스럽게 하는 '4점세트'로 불린다. 여기에 천황 둘째 며느리의 임신소식이 더해졌다. 여성.여계천황 인정을 내용으로 하는 황실전범개정안 정기국회 통과를 공언해온 고이즈미 총리는 결국 물러섰다. 이번 국회통과를 고집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 황실전범 개정에는 처음부터 당내에 찬.반 양론이 팽팽했던 만큼 천황 둘째 며느리의 임신이 오히려 고이즈미 정권을 살렸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 13일에는 방위청의 성 승격법안 제출보류 방침도 전해졌다. 연립여당인 공명당이 방위시설청의 담합비리 수사결과를 지켜보자며 신중론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야스쿠니(靖國)신사참배 자제를 요구하는 당내 반대파도 일단 거둬들였던 새로운 추도시설 건설을 다시 요구하기 시작했다. ◇ 반전 카드가 없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에 따르면 이달 초 현재 고이즈미 내각 지지율은 45%로 작년 12월에 비해 14% 포인트나 하락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2002년 5월의 전격적인 북한 방문, 작년 여름 중의원 해산 등 지지율이 떨어질 때마다 의표를 찌르는 깜짝 이벤트로 구심력을 회복해왔다. 그러나 9월말 퇴임을 앞둔 지금은 반전 카드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총리가 당을 장악하고 자당 소속의원의 군기를 잡는 채찍이자 당근은 중의원 해산권, 당직 및 내각 인사권, 예산편성권 등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작년 9월 총선 이후 이 카드를 모두 써버렸다. 남아있는 카드가 없는 셈이다. ◇ 속내 너무 일찍 누설 고이즈미 총리가 "기회가 왔을 때 도망쳐서는 안된다"며 '포스트 고이즈미'로 아베 관방장관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일찍 내비친 것도 악수라는 분석이다. 모리(森)파 회장인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가 아베 장관을 차차기용으로 아껴두자는 이른바 '아베 온존론'을 제기하자 급한 김에 한 말이 화를 불렀다. 고이즈미-아베 라인이 굳어졌다는 분석은 반대세력의 결속으로 이어졌다. 야마사키 다쿠(山崎拓) 전 자민당 부총재 등 야스쿠니참배에 비판적인 세력은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 추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이 13일 보도한 여론조사에서 아베 관방장관은 포스트 고이즈미 후보로 여전히 가장 높은 43%를 얻었다. 그러나 후쿠다 전 장관을 꼽은 사람도 각 언론사 조사에서 5% 전후에서 갑절인 10%대로 약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차기 자민당 총재 선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고이즈미 총리, 모리 전 총리, 아오키(靑木) 자민당 참의원 회장, 야마사키 전 부총재, 고가 마코토(古賀誠) 전 자민당 간사장 등이 꼽힌다. 이중 고가 전 간사장은 13일 승자독식의 고이즈미식 정치수법이 계속되면 일본 사회가 붕괴한다며 고이즈미 노선을 계승하지 않을 사람을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오키 참의원 회장도 니혼게이단렌(日本經團連)에 내년 참의원 선거에 협력을 요청하면서 "2004년 선거에서 고이즈미 총리-아베 간사장 라인이 의석을 잃었다"고 말해 아베를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도쿄=연합뉴스) 이해영 특파원 lh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