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층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꼭대기에서 킹콩은 부드러운 눈길로 앤(나오미 왓츠)을 본다.


이어 전투기들로부터 총탄세례를 맞고 추락하는 킹콩이 앤의 시선에 비친다.


카메라는 교묘한 방식으로 야수를 연민어린 존재로 만든다.


동시에 문명인이 지닌 야만성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피터 잭슨 감독의 신작 '킹콩'은 무지막지한 괴물로만 킹콩을 묘사했던 1933년 원작이나 1976년 리메이크버전과 달리 킹콩을 따스한 감정을 지닌 인격체로 만든다.


앤을 잡아먹으려던 공룡을 죽인 뒤 킹콩이 취하는 제스처는 연적과의 싸움에서 이긴 남성과 다를 바 없다.


앤도 그런 킹콩에게 애정을 표시한다.


이 영화를 끌어 가는 추동력은 눈을 사로잡는 환상(킹콩과 원시섬)과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현실(앤과 뉴욕)의 뛰어난 결합이다.


공룡과 킹콩의 싸움,초대형 벌레와 인간의 혈투,킹콩과 전투기의 대결 등은 시종 뛰어난 속도감으로 박진감을 더해준다.


작품 속 모든 캐릭터는 중단없이 움직인다.


그들이 쉴 때면 카메라가 대신 움직인다.


이야기의 이런 흐름은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는 정글의 법칙을 빗대고 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대공황기의 뉴욕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생존투쟁에 몰두하고 있다.


원시 섬에서 공룡무리에 섞여 달아나는 등장인물의 모습은 사람이 일개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 작품에서 가장 평온한 순간은 원시섬에서 킹콩과 앤이 석양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야수를 길들인 미녀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원시섬에서 앤을 잡아먹기 위해 달려드는 괴물들은 인간사회에서 미녀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남자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겨울임에도 얇은 흰색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앤은 남성의 공격 앞에 놓인 여성의 연약함을 한층 부각시키고 있다.


현실과 환상의 결합이란 중심 요소는 배우 앤이 참여한 영화촬영현장,뉴욕에서의 킹콩 라이브쇼 장면 등에서도 발견된다.


한줄의 컨셉트로 앤의 환상을 자극해 캐스팅에 성공하는 감독의 화술도 동일선상에 있다.


촬영을 미끼로 배우를 위험으로 몰아넣는 감독의 행위는 투철한 장인정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흥행사업을 위한 탐욕으로 규정짓는 장면도 흥미롭다.


14일 개봉,15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