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WALL STREET JOURNAL 본사 독점전재 ] 유럽이라는 집단은 병들고 유럽연합(EU)이라는 제도는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 치유책은 논의되고 있는 것이 없다. 적어도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EU 통합 헌법이 부결된 후 프랑스와 독일이 택한 대응 전략은 치유책과는 거리가 멀다. 프랑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유권자들의 검증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도미니크 드 빌팽을 새 총리로 앉혔고 독일은 반미 정서를 일으켜 이 난관을 벗어나려 하고 있다. 이는 아집과 맹목이다. EU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제도의 근원적인 모순부터 고쳐야 한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기초를 닦은 EU 통합의 아버지 장 모네는 일찍이 "관료주의를 멀리할 것,지도하되 지배하려 하지 말 것,규제를 최소화할 것"이라는 통합의 대원칙을 만들었으나 EU 지도부는 지금까지 이와 반대로 전체주의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 수백만 가지 규제를 만들어 회원국들의 경제 사회문제에 일일이 간섭하면서 엄청나게 관료화돼 버렸다. 막대한 예산을 굴리면서 회계감사도 받지 않고 부정부패의 싹을 키우고 있다. 이는 EU를 위해 내는 세금보다 돌려받는 혜택이 적다고 생각하는 회원국 국민들에게 앙심을 품게 만들고 있다. 지금까지 EU의 경제정책은 완벽한 모델을 만들어 회원국들을 수렴시키겠다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완벽한 모델이 아니라 경기침체만 심화시키고 있다. 1960∼1970년대 번영하던 유럽 경제가 EU 통합이 시작되면서 제 페이스를 잃어버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현재 유럽에서는 마거릿 대처 총리 시대 이래 미국식 자유 시장 모델을 따라가고 있는 영국을 제외하면 2% 이상의 성장률을 실현하는 나라를 찾아볼 수 없다. 브뤼셀의 관료주의적 시스템에다 강한 노조의 입김이 가세해 유럽 경제는 큰 부담을 짊어지고 있으며 독일과 프랑스의 실업률이 대공황 수준인 10%를 상회하고 있다. 높은 실업률은 사회 불만을 야기하고 이는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된다.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출산율이 한 예다. 지금 유럽에서 일고 있는 반미 정서에도 이런 사회 불만이 반영돼 있다. 반미 정서를 교묘하게 부채질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해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보려는 독일 슈뢰더와 프랑스 시라크 정권인데 이는 초기 EU 통합이 시작된 배경을 생각하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모네,프랑스의 로베 슈만,이탈리아 알치데 드 가스페리,독일 콘라트 아데나워는 사실 전후 유럽의 생활 수준을 미국처럼 끌어올리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따라서 모두 친미주의자들이었다. 특히 아데나워는 명석한 경제장관 루드빅 에르하르트와 함께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자유경쟁 시장 모델을 도입해 독일의 산업과 서비스를 재건했고 이는 '독일의 기적'을 가능케 한 힘이었다. EU는 자본주의와 미국식 시장경제에서 등을 돌렸을 뿐 아니라 그리스 로마 문명과 가톨릭이라는 그 자체의 뿌리마저 잃어가고 있다. EU가 물질주의 이상의 본질적 토대를 갖추지 못하면 죽어가는 대륙을 대변하는 송장과 다를 바 없다. 정리=정지영 기자 cool@hankyung.com ------------------------------------------------------------------ ◆이 글은 영국 역사학자이자 세계 현대사를 담은 의 작가인 폴 존슨이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 '병든 대륙'을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