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가수 레이는 버스정류장에서 불친절한 백인 버스 운전사에게 자신이 2차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다쳐 실명했다고 말한다.


이 간단한 거짓말이 버스 운전사의 태도를 친절한 쪽으로 바꾸고 인종차별을 받지 않도록 만든다.


레이는 또 처음 만난 여성들의 손을 스스럼없이 잡는다.


이같은 태도는 뭇 여성들을 울리는 바람둥이의 전조다.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레이'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실명을 인종차별을 피하고 여자를 유혹하는 도구로 이용한다.


R&B의 거장 레이 찰스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은 신체 장애를 성공의 밑거름으로 삼은 한 인간에 관한 전기영화다.


그래서 장애를 극복한 흔한 성공담과는 전혀 다르다.


이 작품에서 '실명'은 레이를 음악에 몰두하게 하는 근간이 된다.


그의 삶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환영에 시달리도록 하는 죄책감,즉 '마음의 장애'다.


그는 어린시절 동생의 익사를 방관하고 나서 1년 뒤 장님이 된다.


죄책감과 실명의 연관성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의 현재 행위에 이어 과거의 기억을 덧붙이는 편집 방식으로 관객들은 과거와 현재를 원인과 결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만약 주인공의 삶이 일정한 시간 순으로 배치됐더라면 단순히 장애를 이겨낸 천재 가수에 관한 이야기가 됐을 것이다.


이 작품은 또 공포영화적 요소를 얹어 전기영화 장르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카메라는 맹인인 그가 바깥세상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착안해 그의 내면을 파고든다.


그것은 충격적인 풍경이며 그의 일상에 갑작스럽게 출몰해 화면의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레이의 출세 가도에 대한 묘사도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레이의 악단 규모는 솔로에서 중창단으로,관현악단으로 점차 확대된다.


음악 세계도 '내킹 콜'의 모창에서 소울&블루스와 가스펠을 접목시키는 방향으로 넓어진다.


감독은 성공이란 더 많은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셈이다.


레이의 정부(情婦)가 레이처럼 마약 중독에 빠지는 모습은 그 부작용일 것이다.


주연을 맡은 제이미 폭스는 진짜 레이 찰스처럼 연주할 수도 없지만 그를 모방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의 주법을 선보였고 내면의 고통을 훌륭하게 표현함으로써 또 하나의 레이를 창조해 냈다.


25일 개봉,15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