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려나 봅니다. 산길에 눈이 많이 쌓이면 스님들 할 일이 많아져요. 이쪽엔 눈이 많아서 겨울 안거 석달 동안 20차례 가량 눈이 내리는데 큰 절에서 암자까지 4㎞ 떨어져 있으니까 겨울 한 철 동안 80㎞ 이상의 눈을 치우는 셈이지요." 가파른 산길로 지프를 몰아 선원으로 향하던 스님이 눈 이야기로 침묵을 깬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금새라도 눈을 퍼부을 기세다. 겨울 산사에 내리는 눈은 아름답지만 수행자들에겐 또하나의 일거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통을 행복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수행자이다. 눈을 치우는 것은 그들에게 노동이며 또한 좌선으로 굳어진 몸을 풀고 단련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선원이 있는 암자에 도착하자 마침내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전남 장성 백양사를 품고 있는 백암산의 백학봉 아래에 자리잡은 운문암 운문선원.대한불교조계종의 5대 총림 가운데 하나인 고불(古佛)총림의 대표 선원이다. 백제 무왕 때 신라 고승 여환(如幻) 스님이 개창한 백양사는 고려 때부터 정진도량으로 유명한 곳이다. 고려 덕종 땐 정토선원으로 불렸고 충정왕 2년에는 왕사였던 각진(覺眞) 존자가 오래 머물면서 호남에서 손꼽히는 선원이 됐다. 또 조선에 와서는 청허 휴정(淸虛 休靜) 선사의 법통을 이은 환성 지안(喚醒 志安) 선사의 제자들이 차례로 와서 선풍을 드날렸다. 근세에는 만암(曼庵) 스님이 1914년 백양사에 고불선원을 세운 데 이어 47년에 최초의 총림인 고불총림을 결성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백양사에 선풍이 다시 드날리기 시작한 것은 재작년 입적한 서옹 스님이 머물면서부터다. 서옹 스님은 '자각한 사람' 즉 '참나'를 되찾자는 '참사람 운동'을 주창하면서 선을 통한 인간성 회복을 역설했다. 일제 때인 1923년 백용성 스님이 문을 열어 40∼50명의 수좌들이 몰려들 만큼 선풍을 떨쳤다가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운문선원을 되살린 주역도 서옹 스님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운문암에 선원이 다시 생긴 건 지난 84년입니다. 서옹 스님이 운문선원의 문을 열면서 옛 명성을 되찾았지요. 예부터 선가에는 '북(北) 마하연,남(南) 운문'이란 말이 있는데 금강산 마하연 선원과 이곳 운문선원이 이 땅의 선방을 대표한다는 뜻이지요." 눈발을 피해 선방 옆 지대방에서 차를 내던 운문선원 유나 지선(知詵·60) 스님의 설명이다. 지선 스님은 "운문선원은 각진 국사,진묵 대사와 서산·사명·백파·학명·한영·용성·인곡·석암·남전·운봉·고암 등 조선 말기의 기라성 같은 스님들이 다 거쳐간 곳"이라며 "부안 월명암,대둔산 태고암과 함께 도인이 많이 나오는 3대 성지로 꼽힌다"고 덧붙인다. "운문암은 근대 이후에만 교정과 종정이 7명이나 배출된 곳이니 남북한을 합쳐 도인이 가장 많이 나온 곳입니다. 수행자라면 누구나 한번은 거쳐가는 곳이지요. 실제로 이곳에서 수행해 보면 졸음이 오지 않고 기운이 솟아요. 광주 무등산,순천 조계산,화순 모우산이 다 보일 정도로 전망도 일품이지요." 그러나 명성과 달리 운문선원의 규모는 크지 않다. 서옹 스님이 특유의 꿈틀대는 필체로 쓴 '雲門庵(운문암)' 편액이 걸린 선원채는 정면 7칸의 아담한 목조건물로 많아야 스무 명 정도 정진할 수 있는 규모다. 이번 동안거에는 17명이 방부를 들여 정진 중이다. 백양사 큰 절의 고불선원에도 7명이 방부를 들여 비구 선원에만 24명이 수행하고 있다. 운문선원에는 명성만큼이나 방부 들이기가 쉽지 않아 고불선원에서 한철 안거한 뒤 올라오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선원의 청규(淸規)는 여느 선원과 다름없이 엄격하다. 계율에 어긋나는 행동은 일절 용납되지 않고 안거 중에는 산문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청규를 지키라는 권유를 세차례 받고도 불응하면 즉시 퇴방이다. "하루 10시간을 기준으로 정진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정진하느냐보다는 쉬지 않고 여일하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든 수행을 그치면 안되지요. 안거 때 3개월 정진하고 해제 때 3개월 확 풀어놓고 그 다음에 또 결제하는 식으로 반복하면 평생 해도 제자리일 뿐입니다. 결제,해제는 이름일 뿐 깨달을 때까지 계속해야지요." 1980년대 이후 민통련 부의장 등을 맡으며 십수년간 재야운동에 앞장섰던 지선 스님은 이번 철로 12안거째 정진 중이다. 선방 생활만 6년,처음에는 '운동권 스님'의 경력쌓기 정도로 봤던 주위 사람들도 지금은 보는 눈이 달라졌다. "10대 때부터 참선한 경험이 있어서 사회운동 할 때에도 참선을 쉬지는 않았어요. 지난 87년 6월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0.75평짜리 독방에서 6개월 살 때 가장 정진이 잘 되더군요. '정진하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운동할 때,화장실 갈 때,밥 먹을 때 빼고는 계속 참선을 했거든요. 그 후 이철규군 사망사건과 관련해 광주에서 6개월 감옥살이 할 때에도 정진을 계속했는데 성성적적(惺惺寂寂)이 이런 것인가 싶더군요." 감옥이 지선 스님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무문관(無門關)이었던 셈이다. 지선 스님은 "재야 운동을 하며 가졌던 갈등과 불안,회의 등이 사라지고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더라"면서 "지금은 수행해도 그 경지가 다시 오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한다. 지선 스님은 "도인이 나오지 않는 것은 진짜로 수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상사병 난 것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꾸준히 참고 수행해야 진전이 있다"고 설명한다. 입선(入禪)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경내에 울려퍼지자 지대방(선방 옆 휴게실)에서 쉬던 납자들이 다시 선방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 선원 마당으로 나서니 어느새 백설이 도량을 수북이 덮고 있다. 장성=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