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후 5시 부산 국제여객선터미널.일본행 부관훼리선박을 타기 위해 관광객들이 출국장으로 몰려들었다. 여행가방을 든 관광객들과 김 라면 김치 박스 등을 들고 들어가는 보따리상들이 주류다. 오후 7시 부산항을 출발해 다음날 아침 8시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한다. 출국증명서를 쓰고 있는 대구시 달서구 최민수군(초등학교 3년)은 "가족과 함께 하우스텐보스 관광을 하러 간다"며 즐거워했다. 이처럼 선박을 이용한 가족 및 단체여행객이 늘면서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승객 1백만명을 넘었다. 98년 29만명에서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이 신축된 78년 한·일 여객선은 시모노세키를 운항하는 부관훼리 1척 뿐이었으나 현재 하카다,히로시마,쓰시마,오사카 등 5개 노선에 13척이 운항 중이다. 한·일간을 3시간 내 돌파하는 쾌속선도 크게 늘면서 '1일 생활권'이 만들어지고 있다. 새로운 한·일 교류 풍속도를 그려내기에 충분한 시스템을 갖춰가고 있는 것이다. ◆부관연락선의 명암=부관항로가 열린지 올해로 1백년 된다. 1905년 9월12일 일제는 부관연락선 이키마루(1천6백80t)를 처음으로 취항시켰다. 같은 해 11월 쓰시마마루(1천6백t)가 취항하면서 한·일간 뱃길은 매일 연결이 가능해졌다. 45년까지 11척이 양국을 오갔다. 당시 부산은 한국과 일본을 잇는 유일한 관문으로 부관연락선의 취항은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진출을 의미했다. 같은 해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이 구체화되면서 부관연락선은 더욱 바빠졌다. 선박은 중·일전쟁 준비에 필요한 병력,군사물자의 수송과 조선으로 일본인들을 이주시키는 도구로 이용됐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농토를 잃고 탄광의 광부로,부두 노무자로,먹고 살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고향을 등지고 일본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1927년 14만8천명에서 38년 80만명으로 늘었다. 부관연락선은 해방 후 미군 통제하에 한·일 양국의 귀환자를 수송하다 40년 역사를 뒤로 한 채 운항이 중단됐고,지난 70년에서야 부관훼리호로 뱃길이 이어졌다. ◆한·일 뱃길의 현재와 미래=부관항로만 해도 2002년 취항한 우리 선적의 성희호(1만7천t)와 일본 선적의 하마유를 통해 연 16만명을 실어날랐다. 부관훼리는 85년까지 15년 동안 적자를 보면서도 한·일 뱃길을 지켜냈다. 한·일 수교 이후 양국간에는 동반자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뱃길을 열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각료회의에서 논의됐다. 하지만 수익성이 없어 선뜻 사업자가 나서지 않았다. 70년 일본 간푸훼리가 먼저 취항했다. 뒤늦게 한국에서 부관훼리가 사업자로 나서긴 했지만 자금사정으로 일본측의 대리점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이후 83년 우리 선적의 훼리가 취항하기 시작했다. 74년 문세광 사건으로 위험물품을 숨길 소지가 있다해서 수입의 20%를 차지하던 차량 반입이 금지돼 사업중단의 위기감이 감돌기도 했다. 운항 수지를 맞출 수 있게 된 것은 지난 88년 이후.서울올림픽 등 국제스포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여행자유화 조치로 관광객 수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한·일 경제교류 확대 시급=2박3일 한·일여행에 15만원짜리 초저가 상품까지 선을 보이면서 젊은 관광객들이 늘고 있다. 미용과 의료,대학진학을 위해 부산을 찾는 후쿠오카 지역 일본인들이 크게 늘면서 한·일교류가 활기를 띠고 있다. 부산시도 후쿠오카 지역 지자체와 경제협력을 체결,교역확대를 꾀하고 있다. 부관훼리 신의철 상무는 "부산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일본과의 경제교류가 더욱 활성화돼야 한다"며 "물류와 수산업 관광산업을 중심으로 교류를 우선 확대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순일 한국아이엔전자공업 대표는 "한·일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앞두고 한·일기업간 교류를 확대해야 우리 기업들이 경쟁력을 기를 수 있다"며 "기계산업 전자산업은 물론 한·일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영화,의료산업의 상호협력 모델 구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부산=김태현 기자 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