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 성품이 분방한 것을 좋아했으니, 죽거든 산 속에다 장사지내지 말고 큰 길가에 묻어 달라." 서경덕ㆍ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는 황진이는 450여년 전 유언대로 `송도(현재 개성)의 큰 길가'에 묻혔을까. 또 황진이는 스스로 읊었듯이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다가...어른님 오실 때 구비구비 펴리라' 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까. 10일 북한 노동신문 최근호(9.16)에 따르면 개성시는 황진이를 비롯 연암 박지원, 목화에서 처음으로 실을 뽑아낸 문래 등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 준 인물'들의 묘를 훌륭히 보존 관리하고 있다. 황진이 묘는 2000년 복원됐다. 조선시대 중종 임금 때 서화담 등 당대 묵객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황진이는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을 부여잡고 있다. 개성시가 민족문화유산으로 보존하면서 당원들과 근로자들 그리고 어린 학생들까지 황진이의 무덤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은 "우리 것을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조국애이며 주체"라며 철저한 문화유산 보존을 강조했다. 황진이의 유언대로 된 것이다. 황진이는 진사(進士)의 서녀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을 읽고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했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 문인ㆍ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한편 개성시는 황진이 묘 외에도 만월대, 대흥산성, 안화사, 왕건왕릉, 포은 정몽주의 집터에 세워진 숭양서원, 선죽교와 표충비 등을 복구해 보존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ghwa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