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국가보안법 폐지, 신행정수도 건설 등 국정현안을 놓고 당내에서조차 의사 결집을 이뤄내지 못한채 혼선을 거듭하고 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국보법 폐지와 신행정수도 문제에 대한 당론을 추석연휴 이전에 확정하고 민심잡기에 나서겠다고 공언했으나, 양당 모두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져 당론 결정을 추석 이후로 미뤘다. 정치권이 국민과 약속하거나 공개적으로 천명한 주요 현안의 추진 시간표를 스스로의 사정 때문에 지키지 못하고 리더십 공백만 노출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당은 국보법 태스크포스(TF)의 활동 결과를 토대로 국보법 폐지 이후 보완대책으로 형법보완과 보완입법(대체입법)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지를 23일 정책의총에서 결정키로 했으나 내부 이견 조정이 여의치 않자 추석 연휴 이후로 늦췄다. 당내 이견이 해소되기는 커녕 태스크포스에 소속된 일부 의원이 다소 보수적인 개인의견을 당론처럼 언론에 흘리고 문건을 유출시켜 혼선을 부른 끝에 태스크포스 해체를 초래했고, 보완책 마련의 책임은 제1정조위원회로 넘겨졌다. 국보법 개정론을 주장했던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모임(안개모)'이 23일 공식출범할 예정인 가운데 폐지론을 주도해온 임종석(任鍾晳) 의원은 개인칼럼을 통해 "대체입법은 변형된 국보법 존치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나서 논란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사정은 열린우리당보다 훨씬 심각해 보인다. 박근혜(朴槿惠) 대표는 지난 20일 국보법 제2조 `정부참칭' 조항의 삭제와 법명칭 변경 가능성 등 사실상 폐지로 해석될 수 있는 언급을 했다가 당내 보수인사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21일에는 "국보법 폐지는 절대 안된다"며 한발짝 물러섰다. 한나라당내 영남권 보수 중진의원들이 22일 의총에서 박 대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데 대해 초재선 의원들이 박 대표를 옹호하고 나서는 등 주도권 다툼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신행정수도 건설 사업에 대해서도 한나라당은 이날 `천도(遷都)' 수준의 행정수도 이전은 반대하되 충남 공주.연기를 `행정특별시'로 지정하는 절충안을 당론으로 확정하고 박 대표가 기자회견을 갖고 이를 발표하려 했다가 수도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당내 반대파들의 저항에 밀려 추석 이후로 당론 결정을 연기했다.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의 경우도 여당은 법 발효(23일) 이전에 개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무리한 공언을 했다가 한나라당의 반대 등으로 처리시기를 내달 23일 국정감사가 종료된 이후로 미뤘다. 이처럼 여야가 중요 국정현안을 놓고 혼선을 거듭하고 있는 이유는 우선 17대국회 들어 1인 보스 중심의 정당체제가 종식되고 개성이 강한 초선의원들의 백가쟁명식 주장이 거침없이 터져나오면서 당 지도부가 과거와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현상은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정당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일부 의원들의 이기주의와 `매명(賣名)'에 가까운 언행, 국익을 고려하지 않는 개인 플레이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나타난 것이라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실현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채 대중의 눈길을 끌기 위한 법안 제출이 줄을 잇는 현상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특히 여야가 17대 총선 과정에서 당의 이념이나 정책좌표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나 정치적 자질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들을 무분별하게 영입한 것이 이같은 혼선을 초래한 중요 원인이 됐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어쨌든 이같은 상황은 결국 당을 조정하고 통합해내는 리더십의 공백을 초래하고 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고 있다. 국보법 폐지, 신행정수도 건설,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을 비롯한 과거사 관련법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현안에 대한 갑론을박이 계속되는 동안 정기국회 회기의 5분의 1 이상이 훌쩍 지나가 버렸고,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을 비롯한 민생관련 입법의처리도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주요 현안을 둘러싸고 이미 심각한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는 국론을 정치권이 통합해내기는 커녕 오히려 혼선의 장기화를 부추기는 역기능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피하기 어렵다. 현재의 상황을 애써 보스 중심 정치체제의 해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진통으로 봐줘야 한다는 우호적 시각도 없지 않으나,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해야 할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는 지적이다. (서울=연합뉴스) 맹찬형기자 mangel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