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 추문이 폭로된 것을 계기로 자국을 인권침해를 비난해 온 미국에 대해 "우리는 6.25때 미군포로를 우대했다"며 "도대체 누가 인권을 더욱 존중하느냐"고 대 반격에 나섰다. 중국 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는 25일 인터넷판에서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를 인용, 중국 인민지원군이 6.25때 평안북도 벽동(碧潼)에 세운 연합군포로수용소에서 통역으로 일했던 인민일보 원로 편집인 저우위앤민(周元敏)여사의 증언을 소개했다. 중국 군은 벽동 수용수에 엄청난 수의 연합군 포로가 수용되자 영어통역을 위해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학을 비롯해 명문 대학의 영문과 학생들을 통역으로 차출했다. 51년 난징(南京) 진링(金陵)여대 영문과 1학년을 마친 저우 여사는 52년 20살의나이로 벽동 수용소 포로 2대대에 배치됐다. 2대대에는 미군 포로 200여명이 있었다. 저우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중국 군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 포로들에 대해 구타나 발길질 한번 없었고 담배나 개인 용품을 그대로 소지하게 했고, 금시계등 귀중품은 등록.보관한 후 송환때 돌려주었다. 포로수용소 당국은 북한 겨울이 유난히 추웠기 때문에 포로들에게 두터운 솜옷,모자,장갑, 요와 이불 등을 제공했고 난방도 따뜻하게 해주었다. 식사는 쌀밥에 국수, 빵, 콩, 육류등을 골고루 공급했고 매달 설탕도 배급했다. 간부급 식사로 일반 사병보다 내용이 풍부했다는 것이다. 또 건강보호를 위해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총리의 지시로 수용내에 포로 전용 병원을 만들었고, 중상을 입은 한 미군 전투기 조종사를 구하기위해 중국 의사가자신의 피를 직접 뽑아 수혈하기도 했다고 저우 여사는 말했다. 벽동 수용소에는 영어책 도서관도 있었고, 피아노 기타 등 각종 악기와 체육 용구가 지급돼 무료함을 달래도록 했고,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등 때는 종교행사도 허용됐다는 것이다. 철조망과 강제노역도 없었고, 1952년 11월에는 500여명의 포로가 참가한 포로올림픽도 열렸다. 수용소 관리 요원들과 친구사이가 되기도 한 미군 포로들은 휴전협정에 따라 판문점을 통해 송환될 때 수용소 당국에 연방 감사를 표시했다고 저우여사는 회고했다. (베이징=연합뉴스) 조성대특파원 sdc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