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개인용컴퓨터(PC) 10대 가운데 9대에는 'intel inside'라는 딱지가 붙어있다. 인텔 펜티엄 프로세서를 장착하고 있다는 뜻. 거대기업 인텔의 한 해 수익이 50억달러를 넘고 매년 30% 이상의 매출액 및 순이익 성장률을 지속하고 있다. 이런 인텔을 만들고 키운 사람은 지난 97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디지털 혁명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선도자"라며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던 앤드류 그로브 회장이다. '앤드류 그로브의 위대한 수업'(김이숙 옮김, 한국경제신문, 1만2천원)은 그의 자서전이다. 하지만 뉴욕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지난 68년 인텔을 창업해 키워온 이야기는 없다. 메모리칩으로 승승장구하던 인텔이 주력 품목을 바꾸고 공룡같은 구조와 무사안일 풍조를 혁파해 거듭되는 위기를 극복한 성공사례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파란만장했던 유소년기와 청년기의 기억을 담담하면서도 세밀하게 되살려내 한 인간으로서 그가 어떻게 성장하고 역경을 헤쳐왔는지를 보여준다. 193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남쪽의 소읍에서 태어난 앤드루 그로브의 원래 이름은 안드라스 그로프. 유제품 가공업을 하던 아버지와 고등교육을 받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파란만장한 초년생을 보내야 했다. 나치의 지배 하에 어린시절을 보내며 대부분의 친지들이 몰살당했고, 아버지는 독일군에 징집돼 온갖 고초를 겪다 소련군 진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억압적인 공산정권에서 아버지의 회사는 국유화되고 생활고에 시달렸다. 부다페스트대학 화학과 재학중이던 56년 10월에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중들의 '헝가리 혁명'이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에 짓밟혔다. 이로 인해 20만여명의 헝가리인이 서구로 탈출했고 그로브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런 시대적 상황에 그로브나 그의 가족이 적극 저항한 적은 없었다. 헝가리 혁명때에도 그로브는 시위대의 뒤를 따르다 공산당 문장이 잘려나간 국기를 보고서는 "시위의 범위를 넘어섰다"며 집으로 발길을 돌리고 만다. 대신 그의 사고는 철저히 실용적인 쪽으로 향한다. 그로브는 4세때 성홍열을 앓아 청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늘 수업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아 공부에 열중했고,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나는 비언어적 신호를 더 민첩하게 처리해야 했으며 신호에 더욱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문장의 일부만 알아듣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머리를 써야 했다"고 회고한다. '비언어적 신호'에 더 민감하게 된 것이 후일 그를 디지털 시대의 선도자로 만든 것은 아닐까. 지난해 국내에서 번역출간된 '승자의 법칙'에서 "항상 초긴장 상태로 경계하는 자만이 경쟁에서 이긴다"며 '전략적 변곡점'에 유의하라고 한 것도 이런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시대적 상황과 청력이상에도 불구하고 영어와 오페라 피아노 수영 카약 댄스 펜싱 공기총 등 다양한 영역에 도전하는 모험과 도전정신도 읽을 수 있다. 당시 헝가리의 풍경과 시대상을 놀랍도록 정밀하게 기억해낸 점도 인상적이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