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헌 회장 투신자살 '충격'] 그룹 후계자로 대북사업 총괄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은 현대그룹 창립자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5남으로 남북경협 사업을 총괄해 왔다.
한때 재계 1위로 군림했던 현대그룹의 강력한 후계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지만 2000년 '왕자의 난' 이후 숱한 어려움을 겪는 등 영욕이 교차했던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 회장은 보성고 졸업과 동시에 연세대 국문과를 수석으로 입학했으며 대학졸업 후인 75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이어 현대건설 부장(77년), 현대상선 사장(81년), 현대전자 사장(84년), 현대상선 회장(88년) 등 '로열 패밀리'로 승승장구했다.
정 회장은 특히 지난 92년 대선을 앞두고 고 정 명예회장을 겨냥한 정치적 수사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던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에서 아버지 대신 2백99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혐의로 옥살이를 감수, 아버지로부터 총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상선 회장으로 재직하던 98년 6,10월 두 차례 고 정 명예회장의 소떼방북에 동행하면서 그룹의 강력한 후계자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같은 해 정몽구 회장과 함께 그룹 공동회장에 올라 금강산관광 등 남북경협 사업을 관장하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과 2001년 정 명예회장의 타계이후 그에게는 시련이 닥쳤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 및 동생인 정몽준 국회의원(현대중공업 대주주)과 사업을 정리한 이후 정몽헌 회장이 맡은 현대건설과 하이닉스 등 대부분 기업은 부실화됐고 마침내는 경영권까지 상실했다.
정 회장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필생의 대업인 남북경협 사업을 현대아산을 통해 계속 지휘했으나 관광객 감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는 평소 소탈하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조직의 효율성과 상하간 의사소통을 중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업무에 관해서는 '불같은' 성향도 강했던 것으로 현대 관계자들은 말했다.
그러나 학교 동창들 중에는 정 회장이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해 한때 '촌색시' '촌닭'으로 불렸을 만큼 다소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 회장은 취미로 스키와 테니스를 즐겼으며, 유족으로는 부인 현정은씨(현대상선 현영원 고문의 딸)와 1남(18세) 2녀(26,19세)를 남겼다.
-----------------------------------------------------------------
< 정몽헌 회장 약력 >
48년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5남으로 서울 출생
68년 보성고등학교 졸업
72년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79년 연세대 경영대학원 졸업
83년 미국 페어레이디킨스대 경영대학원 MBA
98년 연세대 명예경영학 박사
75~77년 현대중공업 사원~차장
77~81년 현대건설 부장~상무
81~88년 현대상선 사장
84~91년 현대전자산업 사장
88~95년 현대상선 부회장
89~92년 현대엘리베이터 부회장
92~2000년 현대전자산업 회장
93~2000년 현대정보기술 회장
96~98년 현대그룹 부회장, 현대상선,금강기획 회장
96~2000년 현대건설 회장
97~98년 현대종합상사 회장
97~2000년 현대엔지니어링 회장
98년1월13일~98년3월31일 현대그룹 회장
98~2000년6월 현대경영자협의회 회장
2000년 ~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