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이라크에 대한 강경발언을 쏟아내며 전쟁의 선봉에 서는가 하면 전쟁보다는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는 프랑스와 독일을 겨냥해 "늙은 유럽"이라는 독설을 뿜어댄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 독일계인 그는 25년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대사로서 유럽으로 금의환향할때 고조부인 하인리히 럼즈펠드가 19세기 미국으로 이민오기 전까지 살았던 독일 브레멘 근교의 작은 마을 바이헤-쥐트바이헤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이제는 아예 절연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고 있다. 지금도 룸스펠트(Rumsfeld) 성(姓)을 가진 사람이 다수 거주하는 이 지역 사람들은 "럼즈펠드가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밀어부치며 저기에 있다는 것이 끔찍하다.그와 친척 관계라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혈연으로까지 이어지는 미국과 유럽의 전통적인 맹방관계가 이라크전을 계기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미국의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이라크전 반대를 주도하고 있는 프랑스와 미국의 대립을 한때 9.11테러를 묘사했던 단어인 "문명충돌"이라고까지표현했다. 영국이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8개국 공동명의의 군사행동 지지문을언론에 기고하는 방법으로 프랑스와 독일이 유럽을 대변하고 있지 않다며 반격에 나서기도 했으나 미국과 유럽간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가운데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을 주장하는 미국과 영국에 프랑스, 러시아, 중국이 군사행동 반대의 기치를 들어 맞서고 있고 상임이사국은 아니지만 프랑스와 함께 서유럽의 양대 산맥이자 제2차 세계대전후미국의 부동의 맹방이었던 독일도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독일과 프랑스를 잇따라 방문하면서 이라크전 반대 연대를 확인했고 이들 3국은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에 반대하고 유엔 무기사찰단에 더 많은 시간을 부여하며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자는 공동성명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중국도 이에 동조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같은 안보리의 분열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로 이어져 발족 이후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는 이라크와 접경하고 있는 유일한 회원국인터키에 대한 패트리어트미사일, 조기경보기 등의 지원제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미국이 다소 완화된 제안을 다시 내놨지만 역시 거부당했다. 나토는 이같은 사상 초유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지난 60년 프랑스가 탈퇴한 나토의 방위계획위원회를 개최, 프랑스를 제외한 채 합의를 도출하는 방안까지 모색하고 있다. 특히 이라크의 대량파괴무기 개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한스 블릭스 유엔무기사찰단장의 지난 14일 보고서 이후 그동안 안보리에서 미국과 영국편에 섰던 스페인, 불가리아 등 일부 비상임 이사국들도 미국이 더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제2차 결의안에 대해 기권으로 입장을 바꿀 태세인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도미니크 드 빌팽 유엔주재 프랑스 대사는 안보리를 다음달 14일 다시 소집해 이라크 사찰 결과를 다시 논의하자고 제안, 갈길 바쁜 미국의 발목을 잡았으며 러시아까지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이같은 상황은 유엔을 무시하고 이라크에 대한 단독 또는 영국과의 연합 행동을 주장한 미 행정부내 인사들의 입장을 다시 강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있으며 이는 이미 벌어질대로 벌어진 미국과 유럽 주요국가들간의 갈등의 골을 더깊게 만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같은 갈등의 원인을 일부에서는 이라크의 세계 2위 매장량을 자랑하는 석유자원에 대한 자국이익 보호로 분석하고 있다. 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혈맹의 관계를 다졌던 미국과 서유럽의 맹방관계가 유럽에 일고 있는 반미정서와 이라크사태가 맞물리면서 재편의 길을 걷고 있다. (런던=연합뉴스) 김창회특파원 chki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