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한 광고카피처럼 한국은행의 업무는 대체로 조용히 추진된다. 일반인들에겐 막연히 '돈찍는 곳' 정도로 인식되지만 업무를 들여다보면 물가 통화량 금리 환율 등 경제문제마다 한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행정파워는 없지만 정책파워는 어느 정부기관 못지 않다"는 박승 총재의 말처럼 정부와는 다른 차원에서 국가경제의 '숨은 지휘자'이고 금융시장의 '숨은 큰손'이다. 축구경기로 치면 화려한 공격수보다는 경기를 안정적으로 끌고 가는 수비수에 가깝다. 한은의 이같은 '수비성향'은 98년 한은법이 개정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개정 한은법에 따라 은행감독원이 금융감독원으로 분리.통합되면서 은행 등 금융회사에 대한 행정파워가 거의 사라진 대신 금리정책 등 거시경제에 대한 결정 권한은 강화됐다. 한은의 최고 정책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 운영방식도 98년을 기점으로 대폭 강화됐다. 이전까지 비상근이었던 금통위원들이 상근으로 바뀌고 재정경제부 장관이 겸임했던 금통위 의장자리도 한은 총재 몫이 됐다. 그러나 외견상 독립성이 보강됐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재경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금통위원 인사에 정부가 개입하는데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현재 박승 총재를 제외한 6명의 금통위원 중 3명이 전직 관료출신이다. 남궁훈 위원은 재경부 세제실장, 예금보험공사 사장으로 일했고 김병일 위원은 조달청장, 기획예산처 차관을 지냈다. 올 5월 금통위에 합류한 이근경 위원도 옛 경제기획원에서 출발, 재경부 차관보를 거쳐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을 역임했다. 여기에다 현 정부의 첫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태동 위원과 증권연구원장 등을 거치며 관가 분위기를 익힌 서강대 교수 출신의 최운열 위원까지 더하면 김원태 위원(한은 출신)을 제외하곤 모두 '범 관료' 범주라는게 한은 직원들의 시각이다. 금통위원들은 개인적으로도 두루 인연이 깊다. 박 총재를 포함 금통위원 전원이 서울대 출신이며, 이 중 4명은 상대(경제.경영학과) 동문이다. 김원태 남궁훈 김태동 위원은 이른바 'KS'(경기고.서울대) 출신. 연장자인 김원태 위원이 경기고 57회, 남궁훈 김태동 위원은 61회 동기로 고교때 같은 반이었다. 금통위원들 사이에선 "학교 때보다 요즘 더 친해졌다"는 농담이 오갈 정도다. 이근경 위원은 김태동 위원이 경제수석일 때 재정경제비서관으로 호흡을 맞췄다. 최운열 위원은 이 위원과 서울대 상대 동기이고 김병일 위원은 남궁훈 위원과 행시 동기(10회)다. 금통위가 의결한 통화정책을 집행하는 한은의 임원진은 총재, 부총재, 감사와 5명의 부총재보로 구성돼 있다. 박 총재는 한은 조사역으로 출발해 중앙대 교수, 경제수석, 건설부 장관, 공적자금관리위원장 등을 지내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것으로 평가된다. 소신과 말솜씨, 직원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신망이 두터운 편이다. 진념 전 부총리, 전윤철 현 부총리와는 동향(전북)이고 전철환 전 한은 총재에게는 이리공업학교(6년제) 2년 선배다. 박철 부총재는 박 총재와 이름이 비슷해 올해 국정감사에서 '같은 집안이냐'는 농담섞인 질문을 받기도 했다. 68년 입행해 30여년간 조사부 자금부 비서실 등 핵심요직을 두루 거쳐 한은 내에선 '장차 총재감'으로 불린다. 소탈하면서도 97년 한은법 파동 때 '독립운동'에 앞장설 만큼 뚝심도 있다. 때문에 이헌재 전 재경부장관은 박 부총재에게 '독일병정'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재경부 국제금융국장으로 위환위기 극복에 기여했던 김우석 감사는 특별한 학연.지연.배경 없이 오로지 '실력'으로 큰 입지전적인 인물. 대학 3학년때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 은행에 다니다 늦깎이로 도전한 행시(14회)에서 수석을 차지할 만큼 명석하고 성실하다는 평을 듣는다. 이성태 부총재보는 '수석'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인물. 서울 상대 수석 입학, 한은 수석 입행 등의 이력 만큼이나 두뇌회전이 빠르다는 소리를 듣는다. 강형문 부총재보는 원만한 대인관계와 성실한 업무.관리능력으로 임원이 된 뒤 더 빛을 보고 있다. 관장 업무도 정책기획(금리정책).금융시장.은행국 등 한은내 핵심부서들이다. 이승일 부총재보는 인사부 기획부 공보실 등 후선부서에서 주로 일한 특이한 이력때문에 '안방 살림꾼'으로 통한다. 런던사무소장을 지낸 최창호 부총재보와 파생금융상품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이재욱 부총재보는 남다른 국제감각으로 주목받고 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