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4년 3월. 나이지리아 상공으로 접어드는 나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금호가 광주에 타이어공장을 건설한 것은 73년. 분명한 미래성장산업이었지만 막상 공장을 돌리고 보니 타이어를 대량으로 팔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국내의 타이어 수요 기반이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다. 수출부장을 맡고 있던 나는 가방을 싸들고 무작정 아프리카로 출발했다. 일정은 3개월. 이집트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아프리카 10개국을 종단하는 장기 출장이었다. 물론 오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닥치는대로 수주를 해야할 판이었다. 나이지리아는 기반시설이 좋지 않아 여행객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나라 중 하나였다. 계절적으로도 낮으로는 모래 폭풍이 휘몰아치고 밤에는 열대야가 지속되던 시기였다. 그런 나라를 출장일정에 끼워넣은 것은 오일쇼크로 산유국인 나이지리아가 한 해 기름값으로만 1백20억달러를 벌어들이는 전대미문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이 굴러다니는데 타이어 수요도 제법 있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가 작용했다. 나이지리아 수도인 라고스에 도착해보니 나 같은 생각을 한 세일즈맨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일단 호텔 잡는 것부터가 전쟁이었다. 호텔을 잡기도 어려웠지만 호텔비도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올라 있었다. 별 다른 준비가 없었던 나는 당연히(?) 호텔을 구할 수 없었다. 도착 이후 사흘간 숙식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현 KOTRA) 무역관에서 해결했다. 일부 기업들을 접촉해봤지만 성과를 내기는 어려웠다. 택시는 불친절했고 버젓한 대낮에도 총을 든 강도들이 돌아다닐 정도로 치안은 불안했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음 기착지로 옮기고 싶은 심정이 굴뚝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주)대우의 세일즈맨이 전환점이 될 줄이야. 영국에서 온 이 젊은 친구는 라고스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저곳을 마구잡이로 누비기 시작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이틀새 무려 50만달러어치의 의류 오더를 따내지 않는가. 의기양양하게 영국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에 오기가 솟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간 직후 호텔부터 잡았다. 방값은 하루 출장비(숙식비 포함 55달러)의 두배 정도 되는 1백달러였다. 번듯한 호텔에 자리를 잡아야 바이어들도 안심을 하고 상담에 응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다시 시장조사에 들어갔다. 결코 쉽지 않았지만 하루종일 자동차 관련업체들을 이잡듯 뒤진 결과 예리한 틈새를 하나 발견했다. 당시 라고스 항에는 갑자기 밀려들어온 화물로 하역작업이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 타이어 역시 하역이 안돼 시중에는 타이어 부족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타이어 가격이 정상 가격의 2배를 넘어서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현지 벤츠 딜러를 만나 협상을 시작했다. "당신이 당장 타이어를 수입해 팔면 적어도 50% 이상의 이익을 남길 수 있으니 나하고 계약을 하자"고 말했다. 하역사정이 나쁜데 어떻게 당장 타이어를 들여올 수 있느냐고 묻는 딜러에게 나는 밤새 고민 끝에 짜낸 아이디어를 귀띔했다. "왜 꼭 타이어를 배로 실어와야 합니까.비행기로 실어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물론 수송비용이 높아지겠지요.하지만 확실하게 이익은 보장되는게 아니겠습니까." 마침내 계약이 성사됐다. 불과 1주일만에 광주공장에서 6만달러어치의 타이어가 나이지리아로 날아왔다. 수송료는 9만6천달러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하지만 딜러는 타이어를 팔아 큰 돈을 벌었고 나도 회사에 얼굴을 세울 수 있게 됐다. 이후 기착지에서도 수출오더를 따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았다. 대우의 젊은 과장이 잠자고 있던 나의 도전 의욕을 일깨우지 않았더라면 나이지리아는 그저 모래바람에 뒤덮인 불편한 나라로만 기억에 남을 뻔 했다. 정리=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