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가 판치던 시절 러시아의 이미지는 어두웠다. 한꺼풀 벗기면 똑같은 모습의 다른 하나가 나타나는 마트료시카(러시아 전통목각인형)처럼 끝내 속내을 보이지 않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모스크바 세레메체보공항을 나서 레닌그라드고속도로에 올랐을 때 기억속의 그런 이미지는 허물어졌다. 끊임없는 고급승용차 행렬, 신축 중인 대형 쇼핑센터, 눈길을 붙잡는 광고판 등으로 초행길이 낯설지 않았다. 안내를 맡은 타냐는 "소비에트식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뀌려면 한 세대는 더 걸리겠지만 모두가 평등했던 시절과는 확실히 달라졌다"고 했다. 마침 모스크바 정도 8백55주년 기념행사 기간. 차량이 통제되는 큰 길을 가득 메운 모스크바시민들의 모습에서 타냐의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실마리를 보았다. 러시아의 심장 크렘린 동쪽의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고어로는 '빨간'이 아니라 '아름다운' 광장이다. 모스크바국립대학의 기초가 놓였던 역사박물관 맞은 편에 성 바실리사원이 있다. 팔각탑을 중심으로 양파 모양의 돔을 인 8개의 탑이 둘러 선 형태. 이반 대제가 2세기 넘게 이 지역에 군림한 몽골족 카잔 칸을 물리친 기념으로 16세기 중반 완성했다. 거지 같은 몰골이지만 시쳇말로 이반 대제와 독대를 해 모두가 그의 혀를 무서워했다는 수사 바실리가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광장중간에 레닌묘가 있다. 정장차림의 레닌유해가 유리상자에 안치되어 있다. 개방시간을 따로 두고 삼엄한 경비를 펼친다. 레닌묘를 거쳐 스탈린, 가가린, 고리키 등의 유명 인사와 노동자, 병사들의 무덤이 있는 뒤쪽 벽길을 따르도록 유도한다. 지금의 러시아 사람들은 레닌을 영웅으로 생각할까. 타냐는 "나이 든 사람들은 그렇다. 그러나 얘들은 아무 생각없다"고 답했다. 크렘린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크렘린은 러시아말로 '성벽'이란 의미지만 러시아와 세계 정치사에서의 상징성은 어마어마하다. 러시아의 정치와 세계전략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했던 우스펜스키사원, 황족의 혼인과 가족예배 전용 블라고베시첸스키사원, 역대 황제의 관이 안치된 아르헹겔스키사원 등이 있다. 종복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세계 최대규모의 종, 세계 최대의 대포도 있다. 아르바트거리를 그냥 지나칠수 없다. 2km 길이의 아르바트거리엔 활력이 넘친다. 여기저기 공연이 이어지고, 초상화가들의 손놀림이 재빠르다. 고려인 3세 로커 빅토르 최의 차지였다는 곳의 한쪽 벽면은 그를 추모하는 낙서로 가득하다. 모스크바대학 후문 앞의 레닌 언덕. 1980년 반쪽 올림픽을 치렀던 경기장을 중심으로 넓게 뻗은 시가지가 한눈에 잡힌다. 언덕 바로 아래로 모스크바강이 유장하게 휘감아 돈다. 20세기 역사의 한축을 주도하다 대변신을 택한 러시아. 예식을 치르고 와 샴페인을 터뜨리는 신혼부부들의 웃음소리에 그 미래가 비쳐지는 것 같았다. 모스크바=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