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함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 붉은 전사들의 진군은 정상의 문턱에서 아쉽게 멈춰섰지만 이미 세계를 집어 삼켜버린 붉은 물결의 소용돌이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상암벌을 뒤덮은 6만5천여명의 붉은 악마들과 그라운드에 선 태극전사들의 거친 숨결은 사이드라인과 스탠드 사이 11m의 거리를 뛰어넘어 한몸으로 융화됐고 영원토록 바래지 않을 찬연한 진홍빛을 발했다. 세계를 놀라게 한 90여분의 사투(死鬪)를 마무리짓고 고단한 걸음을 멈춰선 전사들에게 붉은 물결의 아낌없는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위르스 마이어 주심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전차군단 독일의 승리가 확인됐지만 `대~한민국'의 포효는 한동안 울려퍼지고 또 울려퍼졌다. 붉은 악마들은 내동 발을 굴렀고 `코리아' 두건을 돌리며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쳐댔다. 이윽고 흘러나온 `아리랑' 합창은 스탠드로 다가선 지친 전사들의 숨을골라주는 정겨운 가락이었다. 부산, 대구, 인천, 대전, 광주를 거쳐 한반도 전역에서 4천800만의 기(氣)와 성원을 몰아온 거대한 물결과 함성은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은빛 방패연 지붕을 배경삼아 지금껏 이뤄낸 `신화의 포효'를 한껏 뿜어냈다. 4강 신화를 창조하고 내쳐 달려온 김에 요코하마 스탠드의 빛나는 피파컵에 입맞춤하러 달려가려던 그들의 꿈은 안타깝게 접혔지만 몸을 내던진 전사들의 투혼은 승리보다 더 눈부시게 빛났다. "붉은 함성으로 그들의 목마름을 적시리..","그대들이 있기에 우리가 있다. 붉은 전사여.." 스탠드에 내걸린 플래카드처럼 쉼없는 붉은 악마들의 외침은 초여름 시원한 빗줄기로 변해 태극전사들의 목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붉은 빛의 관중들은 경기 내내 발을 동동 굴렀다. 전반 20분, 44분 이영표와 최진철이 전차군단의 거한들과 겨루다 넘어져 그라운드를 나뒹굴때 관중들도 똑같은 아픔을 나눴다. 이천수, 차두리가 좌우측을 돌파할 때 그들의 발은 그라운드를 따라 뛰고 있었고 독일 공격수들의 날카로운 슈팅이 이운재의 가슴으로 사정없이 날아들 땐 관중들에게도 섬짓한 가슴졸임의 순간이 함께 했다. 전사들이 스탠드를 향해 걸어나올 때 붉은 꽃잎들은 한장 한장 포개지며 서로의 어깨를 감싸안았고 속으로 눈물을 토해냈다. 패배가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찬란했던 투혼이 눈부셨기 때문이었다.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의 침몰을 낳았던 2002한일월드컵 개막 대이변의 바로 그현장에서 코리아의 기적은 이렇게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독일 팬들도, 세계 각국의 외신기자들도 기적의 팀 한국의 선전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48년 전부터 이어져온 다섯 번의 지난한 도전에서 단 1승도 건지지 못했던 한국축구가 이제 세계 정상의 자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강자로 우뚝섰음을 그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붉은 두건과 `비 더 레즈' 티셔츠로 무장한 회사원 김재영(30)씨는 "태극전사들에게 고맙다는 말 밖에 해줄 수 없는 게 오히려 안타깝다"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경기가 끝났어도 그들의 용틀임에는 한없는 긍지가 뿜어져 나왔다. 수백명의 외신기자들이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장관'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광화문의 붉은 물결. 그 물결을 대표해온 상암벌의 붉은 물결. 세계의 이목을 끌어안아 세상을 뒤덮어 버린 붉은 응원의 물결은 한국 축구의 기적같은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어내기까지 지나온 역경의 순간들과 함께 한 땀방울 그 자체였다. 그들 모두 다음 번 정상의 자리를 약속할 자격이 충분할 만큼, 아니 넘치도록 고투하고 또 고투했다. 이제 달구벌에서 정상보다 더 값진 3위를 향해 붉은 물결과태극전사들은 한번 더 용솟음칠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oakchu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