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광주월드컵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낸 거스 히딩크 감독은 전에 없이 초조한 표정이었다. 이탈리아와 117분의 연장 승부를 펼친 뒤 4일밖에 쉬지 못해 선수들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 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팔짱을 낀 채 선수들의 뛰는 모습을 살펴보는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스페인 선수들의 실력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점이 더욱 부담스운 히딩크였다. 전반 15분께 볼을 다투던 최진철과 홍명보가 부딪혀 그라운드에 나딩굴자 깜짝놀랐고 전반 24분께 상대에게 프리킥을 내주자 머리를 긁으며 '이게 아닌데'하는 말을 내뱉은 듯 했다. 냉정하게 경기 양상을 살피던 히딩크 감독은 스페인의 공격이 거세지자 본래의 격정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힘껏 고함을 질러 수비 라인을 제대로 정비하라고 지시하고 김태영의 패스 실수가 나오자 못마땅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상대 선수가 그라운드에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해 짬이 생기자 김태영과 유상철을 불러다 빠른 말투로 뭔가를 지시하기도 했다. 후반 들어 히딩크 감독의 몸짓은 한층 커지기 시작했다. 선수들이 경기를 제대로 풀어가지 못하자 불만을 가득담은 고함을 질러댔고 반칙을 심판이 제대로 불어주지 않는다며 양복저고리를 벗어 팽개치는 '오버 액션'까지 마다하지 않아 대기심에게 주의를 받았다. 상대 선수가 터치 라인 근방에서 물을 마시자 천연덕스럽게 물병을 건네받아 한모금 넘긴 히딩크 감독은 주심과도 가벼운 볼터치를 나누며 여유를 찾았다. 후반 44분 수비수 김태영을 빼고 황선홍을 투입하면서 몇가지 주문사항을 전달한 히딩크 감독은 팔짱을 낀 채 마른 침을 삼키며 새삼 투지를 다지는 모습이었다. 연장전 30분 동안에도 히딩크 감독은 터치 라인 끝머리에 서서 선수들을 독려했고 황선홍의 단독 찬스가 무산되자 두팔을 벌리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주심의 휘슬로 연장전마저 끝나고 승부차기에 들어가자 히딩크 감독은 다시 차분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돌아와 코치들과 키커 순서를 논의했다. 히딩크 감독은 엄청난 중압감을 털어버리려듯 선수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격려했다. 골키퍼 이운재를 따로 불러 어깨를 몇차례 두드려준 히딩크 감독의 표정에는 오히려 "이제 스페인을 잡을 기회가 왔다"는 자신감이 얼핏 스쳤다. 스페인의 4번 키커 호아킨의 실축이 나왔으나 히딩크 감독의 얼굴은 여전히 싸늘했다. 마침내 홍명보의 슈팅 성공으로 한국의 승리가 확정되자 히딩크 감독은 오히려 울고 있는 스페인의 스트라이커 모리엔테스와 부상으로 뛰지 못한 라울 곤살레스를껴안고 위로해주는 진정한 승부사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손에 땀을 쥐는 120분간의 연장 승부와 심장이 멎는 듯한 승부차기를 지켜본 감독의 표정이라곤 할 수 없었다. 선수들과 일일이 감격의 포옹을 나눈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이 관중을 향한 인사를 위해 그라운드로 몰려 나가자 비로소 엄지 손가락을 지켜들었다. 마치 "봐, 내가 8강에 만족할 것 같아?"라는 야심찬 표정이었다. (광주=연합뉴스) kho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