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인접국 파키스탄 남부카라치공항은 의외로 한산했다. 인구 1천만명에 육박하는 파키스탄 최대 도시의 국제공항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한산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14일 카라치에서 수도인 북부 이슬라마바드로 들어가는 파키스탄항공 364편은정원의 3분의 1도 채우지 못한 채 좌석들이 여기 저기 텅 비어 있었다. 승객들은 대부분 내국인이었고 외국인은 10여명 밖에 안됐다. . 폭풍전야의 고요일까. 이슬라마바드 인근 라왈핀디공항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거리의 모습에서 전쟁을 앞둔 긴장감이나 불안감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택시 기사들은 퇴근길 손님을 잡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음식점마다 사람들이 속속 찾아들고, 가게들도 저녁장사를 위해 화려하게 불을 밝혔다. 이처럼 겉으로는 모든 게 평온하고 정상적으로 비춰졌지만 도시 밑바닥에 흐르는 무거운 불안감마저 완전히 감춰지지는 않았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자의 귀에들려온 말은 이 도시에 사는 미국인들의 일부가 이미 이 곳을 떠나기 시작했다는 풍문이었다. 이슬라마바드로 들어오는 항공기가 텅 비었던 것과는 달리 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항공기는 거의 예약이 끝났다는 말도 들려왔다. 한 호텔 종업원은 불안한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오늘 오전 라왈핀디 공항이 안전문제로 1시간 가량 폐쇄됐다더라"고 귀띔했다. 이슬라마바드를 감싸고 있는 불안감 아래 더욱 무겁게 자리잡고 있는 감정은 주민들의 반미감정이 섞인 불만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미국이 왜 또 남의 나라 땅에서 전쟁을 하려는 것이냐"고 약소국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건설회사 부장인 지아 후세인씨는 "과거에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앞세워 소련과 싸우게 하더니 이제는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려 한다"면서 "그 때 아프가니스탄을 지원했던 파키스탄 보고 이제는 아프가니스탄을 치는데 앞장서라는 거냐"고 볼멘 소리로 말했다. 미국의 테러참사와 아프가니스탄 집권 탈레반세력에 대한 후세인씨의 입장은 파키스탄 주민 여론과 거의 맥을 같이 한다. "우리도 무고한 시민에 대한 테러를 증오한다. 탈레반을 좋아하는 파키스탄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탈레반을 공격한다면 미국의 테러 희생자들처럼또다시 죄없는 탈레반 시민들이 엄청나게 죽을 것 아니냐"고 그는 단호히 말했다. 택시기사 파루크씨는 "도대체 전쟁을 하기 위해 남의 나라 땅을 쓰겠다는 것을납득할 수 없다"면서 "미국이나 영국 같으면 원치 않는 전쟁을 하라고 다른 나라에땅을 내주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만일 무샤라프 대통령이 미국에게 군사기지를 내준다면, 거대한 국민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미국에게 영토 사용을 허용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일부 주장에 대해서도 비난 여론이 훨씬 높다고 주민들은 이야기한다. 은행원 살렘씨는 "과거 아프가니스탄을 내세워 소련과 싸우게 했을 때도 미국은파키스탄을 통해 막대한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게 뭐냐"며"파키스탄은 여전히 가난한 나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쏟아내는 미국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에도 불구하고 결국 파키스탄은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현실론에는 거의 이견이 없었다. 공무원 아장 칸씨는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미국은 파키스탄까지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이 한 번 파키스탄 기지에 들어오면 거의 영원히 눌러앉겠지만 어쩔 수 있겠느냐"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불만을 가슴에 품은 파키스탄 사람들의 관심은 이날 하루 종일 정부와 군부 지도자들의 움직임에 쏠렸다. CNN 방송의 테러참사 보도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않은 채 파키스탄 지도자들이 미국의 요구에 어떤 결정을 내릴 지를 둘러싸고 삼삼오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파키스탄의 더 뉴스지(紙)는 현상황의 곤혹스러움을 지적하며 무샤라프 정부가 최선보다는 어떻게든 손해를 덜 보는 쪽을 택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온세계가 미국의 테러참사에 분노하며 미국의 군사행동에 지지를 다짐하고 있는사이 파키스탄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불만과 우려는 분명 색다른 것이었다. 테러를증오하는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준비하는 전쟁이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해도 이 전쟁은 어쩔 수 없이 지구촌의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짙은 그늘을 남길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이슬라마바드=연합뉴스) 이기창 특파원 lk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