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Economist 본사독점전재 ]

동아시아에서 통화가치 하락과 투자자들의 신뢰 추락이 재연되고 있지만 중앙은행과 재무장관들의 대응방식은 97년전 재앙을 불러왔던 내키지 않는듯한 성명발표와 어설픈 시장개입이 그것이다.

몇몇 중앙은행은 외환보유고에서 적지않은 돈을 끌어다 썼지만 환율방어에 실패했고 시장의 타격은 계속됐다.

얼마나 더 위기가 반복돼야 이들이 파블로프의 개(옛소련 생리학자 파블로프의 실험에 등장하는 개로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조건반사를 보였다)처럼 학습효과를 보여줄 수 있을까?

가장 심각한 나라는 필리핀이다.

이나라 경제는 올해 3~4%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재정적자가 확대되고 경제가 성장둔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는 가운데 페소화 가치는 이미 수개월간 추락행진을 지속하고 있다.

여기에 대통령이 불법도박업자들로부터 9백만달러어치 뇌물을 챙긴 사실이 폭로되면서 정치불안까지 가세, 페소화 가치는 사상최저치까지 떨어져 달러당 51페소를 웃돌고 있다.

도이체방크의 경제학자들은 올해 필리핀의 재정적자가 정부 예상(8백30억 페소.2조원)보다 2배정도 많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 상태로는 3억달러의 차관을 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필리핀 중앙은행은 환율 방어를 위해 꾸준히 외환시장에 개입하고 있지만 계속 헛물만 켜고 있다.

시중에 풀린 페소화를 거둬들이기 위해 10월중 RP금리를 4%포인트 끌어올려 콜금리를 17.25%로 인상하고 은행들에 지불준비금을 그만큼 높이라고 요구했다.

이를 위해 중앙은행은 10월 첫 2주일동안 9억달러를 소비했지만 아무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엄청난 자원낭비일 뿐 아니라 추가 지원의 희망까지 소진시키고 있다.

외환보유고는 이미 IMF가 하한선으로 그어놓은 1백60억달러에서 15억달러가 모자란다.

대만 사정은 이보다 조금 낫다.

필리핀 페소화 가치가 8.1% 떨어진 9월 중순 이래 대만 달러 하락은 2.8%에 그쳤다.

그라나 투자자를 불안에 떨게 만들기는 대만 정부도 다르지 않았다.

대만 정부는 주가부양을 위해 주식공개매입에 나섰지만 외국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지역통화 가치는 더 떨어졌다.

이 지역 투자자들은 대만의 내년 경제성장률이 둔화되고 부실채권이 늘어날 것으로 우려한다.

정부가 주식시장에 무턱대고 뛰어들수록 이 나라 경제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를 더 잃어갈 뿐이다.

투자자들은 이미 홍콩에서 유사한 선례를 경험한 바 있다.

태국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하다.

바트화 가치는 지난 6주일동안 4% 하락했다.

이 나라의 경제 문제도 다른 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정치가 주범이다.

게다가 투자자들은 바트화가 페소화와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고 손해를 줄이기 위해 바트화를 팔아댄다.

이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금리인상은 이미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은행들의 숨통을 더욱 조일 뿐이다.

역외 투기꾼에게 대출을 해주지 못하도록 은행에 규제를 가하는 것은 실패할 확률도 높고 부작용만 초래할 수 있다.

태국은 외환보유고가 넉넉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지금처럼 정부가 시장을 헷갈리게 만드는 상태에서는 외환은행 개입이 아무 효과를 볼 수 없다.

타린 님마해민 재무장관의 ''바트화 가치가 낮아 유감''이라는 10월24일 발언을 총리와 각료들이 즉각 부인한 게 대표적인 예다.

태국 정부는 앞으로도 환율방어를 위해 시장에 계속 뛰어들 태세다.

그러나 시장이 정부의 뜻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현 상태로는 정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투자자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

시장 개입이 꼭 필요하다면 11월 선거를 먼저 치르고 내부 조율을 한 후에 시작하는 게 현명할 듯 싶다.

정리=정지영 기자 cool@hankyung.com

<英 이코노미스트지 10월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