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길 < 청주대 객원교수 / 언론정보학 >

미국사람들은 ''유에스 택스 페이어(the US taxpayers)'' 혹은 ''아메리칸 택스 페이어''라는 말을 잘 쓴다.

직역하면 ''미국 납세자''이지만 이 말은 ''미국 국민''이라는 말로 의역해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

세금은 국민의 의무이면서 동시에 세금을 낸 국민은 그 돈을 쓰는 정부를 감시할 권리가 있다는 뜻에서 그렇다.

미국에서 유에스 택스 페이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은 정치인들이다.

그 중에서도 세금을 집행하는 행정부를 감시하는 상·하 양원의원들이다.

미국 의원들은 자기를 뽑아준 국민,유에스 택스 페이어를 대표하여 행정부의 예산 수립과 집행을 철저하게 따진다.

행정부의 예산은 분야별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뒤에도 집행단계에서 양원 세출위원회를 거쳐야 국고에서 돈이 나갈 수 있다.

이때 의원들이 따지는 기준은 국민의 여론,''퍼블릭 오피니언(public opinion)''이다.

예산을 세우고 집행하는 전 과정에서 국민의 여론을 거듭 물어보고 집행하는 것이다.

우리말에 ''국민의 혈세''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 정치인들도 입으로는 이 말을 자주 쓴다.

물론 우리나라 국회도 예산 수립 과정에서 상임위와 예산결산위에서 심의와 의결을 거쳐 본회의를 통과하는 절차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일단 본회의를 통과하면 그 집행은 더 이상 통제가 없다.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한국인의 전통적 사고방식의 특징중 하나인 인정주의 조직원리에 따른 정치문화에서 가능한 얘기다.

더구나 한국인의 여론은 인정주의에 약하다.

대형사고를 당할 때마다 우리는 사고를 낸 개인이나 법인의 책임을 넘어 국민의 혈세까지 동원하여 희생자들에게 수억원의 보상비를 지급해 왔다.

유가족들의 억제되지 않은 원초적 감정 호소가 텔레비전과 같은 감성적인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충격을 통해 국민 여론이 증폭된 결과였다.

또 은행이 큰 기업의 파산으로 부실해졌을 때 정부는 공적자금을 조성,지원해 왔다.

지금까지 대우그룹에 쏟아부은 정부의 공적자금 액수는 20조9천억원,앞으로 7조원이 더 필요하여 40조원의 공적자금을 추가로 조성한다는 것이다.

유에스 택스 페이어 같으면 어림도 없는 소리다.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과 1994년 제네바 합의에서 경수로가 완공될 때까지 매년 50만?의 중유를 공급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1997년과 1998년 북한잠수함 동해안 침투,미사일 시험 및 중동 판매,금창리 핵시설의혹 등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면서,미국에서는 특히 공화당을 중심으로 클린턴 행정부의 북한 포용정책을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1997년 하원 세출위원회는 해마다 북한에 지원해온 중유 50만?의 구입 예산을 통과시켜 주지 않아서 클린턴 행정부는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긴급자금을 동원하는 등 곤경을 치른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공화당이 다수당이었던 의회는 인도주의에 입각한 대북한 식량지원 예산조차 북한 도발을 견제하겠다는 클린턴 행정부의 약속을 받고 나서야 통과시켜 주었다.

일본 언어학자 나카무라 하지메는 고전적인 그의 연구서 ''동양인의 사유(思惟)방법''에서 중국인은 개인으로서 자기와 가장 사적인 인륜조직인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이기주의가 발달하여 사회나 집단의 공공 도덕심이 박약하다고 말했다.

가족이라는 인륜조직을 중요시하는 점에서는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인들은 야쿠자 같은 특수한 인륜조직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보이는 특색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보다 강한 한국인의 인정주의 사고방식은 결국 개인중심의 이기주의와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보통 작은 모임에서도 공금 사용에 대하여 따지는 것을 쩨쩨하게 여기는 인정주의를 곧잘 보인다.

내 돈이 아니면 나 몰라라 하는 개인중심의 이기주의다.

이 사고방식은 국가재정,공적자금으로 확대되어 세계화시대 우리 경제의 투명성과 함께 국제적인 신인도를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고 있다.

세계화시대 정치는 돈 따지는 문제를 최우선 이슈로 삼아야 한다.

우리 국회도 국민의 혈세를 감시하는 제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