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은 욕망을 그린 ''정청(靜聽)''

이 그림은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의 조선미술전람회(1934년·13회) 입선작이다.

지금 운보의 미수(米壽) 기념전이 열리고 있는 조선일보 미술관(15일까지)에 가면 볼 수 있다.

일본의 소장가에게서 빌려온 작품으로 전시회에 출품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정청(靜聽)''에는 애틋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 그림의 모델은 운보의 첫사랑인 소저라는 아가씨와 그때는 어린이였던 운보의 누이동생 김기옥이다.

운보는 1932년 어머니를 여의고 비원 앞 운니동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 집에 세든 모녀와 운보가족은 이웃사촌이 되었다.

운보는 폐병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기생딸 소저를 좋아했다.

그는 어머니를 잃은 직후여서 소저에게서 모성애를 느꼈다.

언젠가 운보는 "소저가 나의 첫사랑이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운보는 애인을 모델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 출품할 작품을 그리겠다고 작정하고,여동생과 소저를 데리고 몰래(운보의 외할머니는 폐병이 전염된다고 소저를 싫어했다) 집을 나와 응접실이 잘 꾸며진 어느 의사집에서 스케치를 하고 이것을 비단에 옮겨 그렸다.

이 일이 있은 후 폐병을 앓던 소저는 운보집에서 이사했고,선전에 입선 발표가 나던 날 운보는 이 기쁜 소식을 소저에게 전하러 찾아갔지만 그녀는 객혈 끝에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작품에서 백선(白扇)을 들고 있는 초췌한 모습의 아가씨가 소저이고,공을 안고 있는 어린이가 운보의 여동생이다.

이 여동생은 6·25 한국전쟁 때 북으로 가 지금은 의사로 일하고 있다.

그의 나이 벌써 74세,고희(古稀)를 넘긴 할머니가 되었다.

이 그림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병색이 짙은 소저의 모습이고,또 하나는 축음기다.

인물화에서 꼭 그리지 않아도 될 축음기를 주제로 삼은 것은 흥미롭다.

''정청(고요히 듣는다)''이란 타이틀도 바로 축음기에서 나온 것이다.

필자는 지난 81년 운보와 함께 66일 동안 세계화필기행을 하면서 가슴 아프게 느낀 게 있다.

노르웨이의 세계 폭포전시장 같은 피오르드를 보면서 "저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운보의 탄사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무릎을 쳤다.

이게 바로 청각장애자인 운보의 한이로구나!

그 한풀이가 위대한 예술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미술사가도,평론가도 운보의 작품을 이런 시각으로 본 사람은 없다.

필자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가 67년에 국악사(國樂士)를 그린 ''아악의 리듬''도,77년 한국미술 유럽순회전의 포스터 그림이었던 ''새벽종소리''(1974년 제작)도,69년 뉴욕에서 제주도 천제연 폭포를 연상하면서 그렸다는 ''수성동(水聲洞)''도,80년에 그린 ''농악''도 모두 그의 듣고픈 욕망을 표현한 작품이란 걸….

< 월간 art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