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린의 만화 "비천무"는 80년대 후반을 풍미했던 역작이었다.

중국 원나라를 배경으로 한 장대한 스케일과 무협이 어우러진 역동적인 스타일안에 펼쳐지는 비극적인 사랑.

대하 서사극을 방불케 하는 "비천무"는 기존 순정만화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만화팬들을 열광시켰다.

87년 첫 장을 넘긴후 91년 11권으로 완결된지 1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스테디셀러다.

영화 "비천무"는 바로 그 "비천무"를 원작으로 삼았다.

최고의 인기를 누린 만화를 영화로 만들기란 일정한 인지도를 담보받는 동시에 어느정도의 위험부담을 안는 일이다.

만화의 한컷은 한컷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남녀간의 애틋한 눈빛만으로도 읽는이의 머릿속에는 온세상을 녹여내릴 듯한 뜨거운 사랑이 펼쳐지는 법이다.

끝없는 상상력을 더해 견고한 환상을 구축한 독자들은 말과 영상으로 의미를 제한하는 화면에 인색한 눈길을 보내기 쉽다.

이런 점에서 "비천무"는 일단 원작의 비장미를 충분히 살려내진 못했다.

11권짜리 장편을 2시간 남짓한 영상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비극의 씨앗이 되는 서사적 배경과 이야기 구조가 밋밋해졌다.

이야기의 축을 이루는 몽고군 장수의 서녀 설리와 고려인 후예 진하의 비극적인 사랑역시 섬세하게 파고들지 못했다.

하지만 "무협멜로"라는 이름을 내건 비천무는 분명히 타이틀에 화끈하게 부합하는 영화다.

물경 4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는 세련된 특수효과와 정교한 액션으로 확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영화의 촬영지인 중국의 "청명상하도 세트장"은 동양 최대라는 규모답게 보기만해도 시원한 무대를 마련한다.

홍콩식 와이어 기법을 동원한 고난도 무예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물위를 나는듯 등장한 철기십조가 몽고군을 초토화시키는 초반 10분은 관객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자객이 섬광처럼 하늘로 솟구치거나 검으로 땅을 가르고 검객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도 박진감있다.

"동방불패""천녀유혼"의 정소동 무술팀은 한국영화에서 한번도 보지못한 날렵한 액션을 구현해냈다.

설사 그것이 한때 유행했던 홍콩무협을 빼닮았을지라도 새롭다.

검에 두쪽난 몸뚱이나 칼로 잘려 땅에서 나뒹구는 머리들도 소름끼치게 리얼하다.

컴퓨터 그래픽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비천무가 올여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과 대적할 유일한 한국영화로 기대를 모으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하지만 화려한 외형을 뒷받침하지 못한 배우들의 연기는 아무래도 실망스럽다.

웅장한 그림과 장쾌한 액션에 넋을 잃다가도 주연배우들의 어색한 발성이나 단조로운 연기가 나오는 순간 긴장이 확 풀린다.

비운의 검객 자하랑 역의 신현준은 몸을 던지며 분투한다.

이글거리는 눈빛은 비장함을 물씬 풍긴다.

하지만 무게가 실리지 않은 대사는 매력을 반감시킨다.

비련의 여인 설리역의 김희선에 가서는 안타까울 정도다.

피를 토해야 할만큼 간절한 순간에서도 건조하게 대사를 읊조리는 그는 아름다우면서도 지적이고,연약하면서도 강인했던 설리를 연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김혜수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