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은 영웅인가 악당인가.

작가 구효서(42)씨가 장편 "악당 임꺽정"(전2권, 해냄)을 통해 벽초
홍명희의 영웅 임꺽정 이미지를 정면으로 뒤집고 나섰다.

소설은 신분차별 없는 평등사회를 꿈꾸던 한 인물이 대의명분을 접고
1인지배의 권력욕에 빠져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화자는 서림.

아전 출신인 그는 신분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며 임꺽정의 산채로 들어가
책사로 활약하다 그의 권력야욕에 환멸을 느끼고 도망친 인물이다.

작가는 서림의 눈을 통해 임꺽정의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파헤친다.

벽초에 의해 미화돼 4백년간 굳어졌던 "박제된 영웅"의 겉옷을 벗기는
것이다.

서림이 들려주는 얘기는 임꺽정의 이름에 얽힌 것부터 다르다.

백정인 아버지가 아들의 예사롭지 않은 면모 때문에 걱정한 나머지 "꺽정"
으로 불렸다는 설은 조작됐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사람 구실할 것처럼 생겨먹지 않아 "껍질과 쭉정이"라는 뜻의
사투리로 푸념한 데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그가 두령패를 이끌고 한강 이북 5도를 주름잡을 수 있었던 것은 날렵한
단도 솜씨와 무모할 정도의 담력, 얄팍한 지략 덕분이었다.

그가 수월도를 던지는 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

그는 이를 무기로 각처의 두목들을 제압한 뒤 황해도 곰섶골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물론 처음에는 평등사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부잣집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민초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곰섶골은 또 하나의 왕국으로 바뀌고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권위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는 일은 용서하지 않았다.

공동재산을 공평하게 나눠 쓴다는 미명 아래 자신의 명령 없이는 곳간
자물통을 열지 못하게 했다.

사유재산도 허용하지 않았다.

재물과 권력을 독점해야 지배체제가 강화되기 때문이었다.

자릿세를 받았다는 이유로 두령 백운치를 처형한 일도 그랬다.

그는 이를 계기로 자신의 권좌를 확고히 지키고 부하들을 완벽하게 얽어맬
수 있었다.

그는 한강 이북의 일정한 영역을 지배하는 군주 노릇에 맛을 들였던 것이다.

그가 몇년동안 잡히지 않았던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윤원형을 비롯한 당시 집권자들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된 허점을
임꺽정이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궁궐의 권력자와 산채의 난적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다는 얘기다.

꺽정이 부하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얼토당토 않게 북한산성을 공격한 것도
그때문이다.

그 일은 윤원형에게 불리한 권력 내부의 상황을 순식간에 유리하게 뒤집는
계기로 작용했다.

적당한 혼란이 오히려 그들의 권력 유지에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권력을 위해 관군과의 협잡도 서슴지 않았고 여론을 조작하는가 하면
위협이 되는 인물들은 잔인하게 몰살시켰다.

작가는 "벽초에 의해 영웅으로 거듭난 임꺽정은 식민지 백성의 억눌린
감정을 위무하고 저항의식을 부추길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래서
다분히 정치적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이미지가 무비판적으로 복제되고 재생되기만 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해체함으로써 미화된 개인의 영웅담 뒤편에서 인간의 양면성과
정치권력의 폐해를 들춰낸다.

그의 이미지 해체는 대의와 명분을 목표로 삼다가 일단 권력이 손 안에
들어오면 태도를 바꿔 자신의 권력을 굳히는 데 몰두하는 정치권의 생리를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 고두현 기자 kdh@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