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게도 지금까지 한국을 지배해 온 것은 한 손의 원리였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국토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분단현상과
양극화 징후가 일어났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나 나와 출신고향이나 배경이 다른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거기에서 생겨난 것이 그러면서도 평등이라기 보다 무등사상이 사회를
지배해 왔다.

남의 성과와 노력을 생각하지 않은 결과의 평등주의가 여러 곳에서 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동시에 무한 경쟁이라는 일방적인 자유 의식 때문에 소외층과 한번 패배
하면 사회복귀가 어려워지는 전락의 사회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한 경쟁에서의 소외와 전락은 결국 장기적으로 보면 자유경제 체제
자체의 위기를 가져 온다.

그러므로 불가불 무한경쟁의 경제원리인 자유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정치 원리인 평등이 서로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두손의 정책이
필요하게 된다.

"하나님은 두 손으로 때리지 않는다"는 오래된 속담처럼 한 손으로는 죄를
징벌하면서도 또 한손으로는 구제의 사랑을 베푸신다.

사회의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문화란 말은 문치교화의 준말로서 형벌을 가하기 전에 먼저 교화를
하라는 뜻이다.

그것이 문화요 덕의 힘이다.

이론적으로는 무한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탈락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만 그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고 창의성을 발휘하여 개인은 물론 사회와 기업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생태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약육강식의 일방적인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좀더 자세히 더 깊이 자연 생태계를 바라보면 악어와 악어새 같은 직접적인
공생관계가 아니라고 해도 약자와 강자가 오묘하게도 생태계의 밸런스를
지켜 가는 상호보완 협력적인 상생의 원리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사슴을 잡아먹는 늑대라고 할지라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사슴들의
생존환경인 초원을 지켜주는 파수꾼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슴의 번식을 조종함으로서 초원의 황폐를 막고 있다는 것은
이미 수십년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아리조나의 실험에서 드러난 사실
이다.

그렇다고 평등 일변도의 사회 정치원리가 지배하게 되면 구 소련과 같이
천국 아닌 지옥이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복지사회는 일하는 사람에게 과중한 세금의 부하가 걸린다.

북유럽의 경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국보라고 일컬어지던 베르히만
감독이 세금에 견디다 못해 미국으로 이민해 버린 것 같은 예가 벌어진다.

그래서 바를 정자의 풀이처럼 일정한 한계 선인 일에서 지, 즉 멈추어
설 줄 아는 힘이 옳은 것이라는 옛 선현의 말이 결코 낡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정이라는 중용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새 천년을 맞는 21세기의
덕목이 되는 것이다.

20세기의 역사는 극단주의의 세기였다.

극한과 양극화 그리고 대립과 갈등의 긴장 속에서 사회를 발전시켜간
이른바 파라노이아(편집광)의 시대였다.

파라노이아의 병을 고치지 않고서는 건강한 새 천년을 맞이할 수가 없다.

기업도 정치도 문화도 모든 원리가 그렇다.

"새 천년의 꿈 두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새천년 준비위원회가 하고 많은 그 흔한 구호를 두고 두 손의 원리를 주장
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한손의 원리를 두손의 원리로 바꾸는 것, 나와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마음을 그렇게 바꾸면 새 천년의 꿈은 결코 멀고 먼
시간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오늘이 된다.

파랑새는 동화나 현실이나 언제나 가까운 처마 밑에 있는 법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