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다 앞서 IMF 구제금융을 받은 경험이 있는 영국의 언론인들은
한국경제개혁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한국경제신문은 "한국의 경제위기와 개혁프로그램"을 주제로 한 외국인
좌담회 시리즈 아홉번째로 영국 BBC방송과 파이낸셜타임스 서울 특파원들
과의 자리를 마련했다.

이들은 "지난 70년대 영국이 그랬듯이 외환위기를 경제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지금까지 한국정부의 개혁노력과 방향을 봤을때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진단했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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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언론인들의 한국경제개혁 평가 ]

[[ 좌담 참석자 : 앤드루 우드 < BBC방송 서울특파원 >
존 버튼 < 파이낸셜타임스 서울특파원 >
전성철 < 국제변호사 / 사회 > ]]

<> 전성철 국제변호사(사회) =저널리스트의 시각에서 본 한국 금융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 존 버튼 파이낸셜타임스 서울 특파원 =무엇보다 자본이 적절하게 분배
되지 못한데 따른 기업의 경쟁력약화를 들고 싶다.

생산성을 앞지른 근로자들의 급격한 임금상승과 지나친 정부규제 금융시장
의 미흡한 개방도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정된 일"
이었다.

<> 앤드류 우드 BBC방송 서울 특파원 =사회.문화적 요인도 위기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본다.

한국인들은 과거 성장신화에 도취해 있었다.

지금까지 고속성장을 해왔으니 앞으로도 모든게 잘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다.

<> 사회 =정실자본주의 등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가 위기의 원인이었다는
지적도 있는데.

<> 버튼 =한국의 경제를 아시아적 가치로 해석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헤일 취리히 금융그룹 회장은 한국이 아시아보다 오히려 동독과
매우 유사한 경제시스템을 가졌다고 평가했었다.

정부가 깊숙이 개입하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한 경제개발정책을 도입
했다는 얘기다.

역사적으로 봤을때도 한국은 20년대 소련, 30년대 만주의 개발정책과
비슷한 경제정책을 도입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경제개발과정을 아시아적 가치의 잣대로 해석하는건
무리가 있다.

<> 우드 =맞는 말이다.

지난 2월 한국에 처음 왔을때 사회주의적 분위기를 강하게 느꼈다.

사회주의국가에서 정부가 맡았던 복지를 한국에서는 기업이 책임졌다.

상당수 회사원들이 회사가 제공하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며 학비도 회사가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회사소유 병원에서 치료도 받는다.

그러나 경제위기로 인한 기업도산으로 사회복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한국은
구소련연방이 붕괴됐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구소련연방은 공산주의가 붕괴돼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다.

따라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새 경제개발정책을 모색하고 있다.

일부 한국인들도 과거로 다시 돌아가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서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다.

<> 버튼 =지난 80년대말 동유럽이 무너질 당시 한국도 변화를 모색했어야
했다.

전두환 정권은 80년대에 정치적으로는 탄압은 가했지만 경제부문에서
개혁.개방주의를 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정권의 개방주의적 경제정책이 많이
후퇴했다.

전두환 정부에 비해 좀더 포퓰리스트(populist) 색채가 강했던 노태우
정부는 경제개혁에 따르는 고통이 크다는 것을 알고 중도에 포기했다.

김영삼 정부로 이어지면서 경제정책은 더욱 갈피를 못잡았다.

단적인 예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93년초는 한국 경제가 침체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김 정권은 구조조정에 나서지 않고 기업들에 투자를 확대하라고
독려했다.

기업들은 달러빚으로 투자확대에 나섰으며 결국 과잉생산문제가 발생했었다.

경제위기는 여기서 출발한 셈이다.

<> 사회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의 경제개혁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

<> 우드 =노력은 높게 평가한다.

다만 김대중 정부가 경제개혁을 실천할 만큼 강한지는(tough) 의문이다.

20여년전 김대통령이 가졌던 열정도 많이 약화된 것 같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를 지지해온 정치적 후원세력들도 많이 바뀌었다.

따라서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주창해온 자유주의경제체제에 대한 신념이
흔들릴 수도 있다.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도 당선이후에는 지지세력이 바뀌면서 경제개혁에
대한 의지가 많이 약화됐다.

내가 만난 외국인들은 그런 우려에서 한국에 대한 투자를 망설이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 버튼 =김대통령은 그동안 경제개혁을 과감히 추진했다고 본다.

금융 기업 노동시장 등 3개부문에서 이뤄진 개혁은 성공적이었다.

방향도 제대로 잡았다.

외국인 투자가들도 한국 경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앞으로 할일이 더 많다.

<> 사회 =외환보유고증가 금리인하 등 거시지표들이 좋아지면서 한국의
외환위기는 진정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기업부채가 더 큰 문제로 등장했다.

높은 부채비율과 낮은 수익률로는 기업들이 더이상 버티기는 힘들 것으로
보는데.

<> 버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는 먼저 은행 등 금융기관들을
국유화해야 한다.

그런 다음 은행들은 기업들의 부채를 출자로 전환시킨 뒤 경영권을 장악해
이들 기업을 보다 유능한 전문경영인들에게 맡겨야 한다.

<> 사회 =관치금융이 경제위기의 주요 원인이었는데 은행을 국유화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않는 얘기 아닌가.

<> 버튼 =은행경영권을 정부가 장악한다해도 과거처럼 전횡을 휘두를 수는
없다.

과거와는 달리 금융시장개방 등으로 정부의 입김을 완화할 수 있는 장치들
이 마련돼 있다.

소액주주제, 투명한 회계제도 등도 이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3~5년정도 지나 위기상황이 진정될 경우 경영권은 당연히 민간으로 넘어
가야 한다.

<> 우드 =기업들의 진입.퇴출 장벽이 낮아져 파산한 기업들이 보다 유능한
경영자에게 넘겨질 수 있는 환경도 마련돼야 한다.

<> 사회 =경영권을 견제할 수 있는 주주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던 것도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시아적 기업문화에서 주주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가.

<> 버튼 =가능하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제일은행 삼성전자 등을 상대로 벌여온 소액주주권리
찾기운동이 좋은 결실을 맺고 있지 않은가.

만약 이같은 소액주주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외국인의 대한
투자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가족중심의 소수 대주주가 지배하는 경영체제에도 큰 변화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대기업 창업주들이 지난 30여년간 경제개발에 기여한 점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지만 과거 창업세대들의 경영환경은 매우 좋았었다.

국내시장은 완전히 보호돼 있었고 군사정부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같은 환경에서 누구나 손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 사회 =그러나 현대 등 대기업 창업주들의 기업가정신은 높이 평가될수
있지 않는가.

<> 버튼 =기업가 정신도 자유경쟁시장체제에서 더욱 잘 발휘할 수 있다.

그동안 정치적.경제적 억압으로 인해 한국의 기업가정신은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기업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기업가
정신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스웨덴의 발렌버그 그룹은 한국의 가족중심 경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형적인 가족중심 경영체제인 발렌버그 그룹은 볼보 에릭슨 아스트라
등 스웨덴의 웬만한 기업은 모두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가족이 직접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

경영은 전문경영인들이 맡는다.

그러나 수익률 배당률 등으로 경영을 평가하고 문제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전문경영인을 갈아치운다.

다른 주주들로부터 압력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기업들에 발렌버그의 경영체제를 추천하고 싶다.

그런 체제에서 대기업간 불필요한 매출경쟁도 사라질 것이다.

첨단 중소기업을 집중 육성해온 대만도 한국에 좋은 본보기가 된다.

사업다각화보다는 전문화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이다.

<> 우드 =AT&T도 기업분할을 통해 장비분야를 많이 잘라내고 통신분야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 결과 주주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는 등 경영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 사회 =영국도 지난 70년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다.

당시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었나.

한국에 조언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우드 =지난 73년 오일쇼크에 따른 경기침체로 파운드화 가치가 급격히
떨어졌고 이로 인한 물가상승과 외환보유고 감소로 결국 외환위기에 직면
했었다.

경제.문화적 차이로 한국과 영국을 단순 비교하기는 힘들 것으로 본다.

영국은 경기사이클 개념에 익숙해 있었다.

7~8년간의 호황뒤에 2~3년간의 침체기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오랜기간 호황이 지속됐기 때문에 경기침체가 올 수
있다는 사실자체를 잊고 있었다.

충격이 당연히 클 수 밖에 없었다.

<> 버튼 =영국은 IMF 관리체제를 고질병을 고치는 계기로 삼았다.

IMF는 한국에서처럼 영국에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혁프로그램을 요구
했었다.

반발이 있었지만 영국은 따랐다.

IMF 개혁프로그램은 영국 경제정책을 새롭게 정립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처 총리는 강력한 리더쉽을 바탕으로 일관성있는 개혁조치를 통해
"영국병"을 치료했다.

영국은 지금 활기가 넘치는 경제대국으로 도약하고 있다.

한국도 위기를 기회를 삼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 우드 =IMF 관리를 계기로 영국인들의 편협된 사고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영국에 진출한 외국기업들에 대한 색안경도 벗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우리 아버지세대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었다.

반일 감정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러나 최근들어 독일에서 만든 롤스로이스를 타느니 영국에서 만든 도요타
를 타겠다는게 영국국민들의 생각이다.

영국에 공장을 지은 도요타는 바로 영국기업이다.

한국에서도 외국기업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이 외환위기이후 많이 누그러질
것으로 본다.

<> 사회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빅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 버튼 =바람직하다.

빅딜 등을 통해 과잉생산문제가 상당부분 해소될 것으로 본다.

초기에는 생산규모에 변화가 없겠지만 앞으로 생산규모를 둘러싼 기업끼리
의 소모적인 경쟁이 사라지기 때문에 시장규모에 따른 조정이 이뤄질 것이다.

<> 우드 =다소 비관적으로 본다.

전혀 다른 문화와 성장배경을 갖고 있는 기업이 합칠 경우 부작용이 더
많다.

얼마전 경북 구미에 있는 LG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LG반도체를 중심으로 LG전선 LG전자 등이 일관생산시스템으로
연결돼 있다.

만약 LG반도체의 경영권을 현대가 갖게 될 경우 이같은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합리적이지 못하고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수 없다.

<> 사회 =한국 정부의 대외언론활동은 어떤가.

<> 버튼 =김대중 정부들어 많이 좋아졌다.

정부의 고위관계자들을 면담하기도 쉬워졌다.

정부 부처에 해외언론 전담부서가 생긴 것도 도움이 된다.

<> 우드 =그러나 취재원들로부터 솔직한 대답을 듣기가 매우 힘들다.

< 정리=김수찬 기자 ksch@ 조정애 기자 jc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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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