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엔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살아남는 재주를 지녀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견해들이 많다.

그것들의 존재는 흥미로운 현상이라 근년엔 그것을 탐구하는 "memetics"란
학문까지 나왔다.

"견해 유행병학(epidemiology of ideas)"이라고 풀이되는 그것에 따르면
사람들의 견해는 바이러스들과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견해들은 한 숙주로부터 다른 숙주로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으면
그것들의 가치와는 관계없이 번창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한창 유행하는 "햇볕론"도 그런 견해들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원래 북한에 대한 유화책을 주장한 사람들이 내놓았는데 김영삼
정권이 대북한 정책으로 내걸어 크게 유행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의 대북한 정책이 실패하자 한동안 잠복했었다.

그러다가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문득 공식 정책으로 나타났다.

"햇볕론"은 바람과 해가 사람의 외투 벗기기 시합을 한 서양 우화에서
나왔다.

그 시합에선 "부드러운 해"가 "모진 바람"을 이겼으므로 그 교훈은
부드러운 태도가 모진 태도를 이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투를 입은 사람에게 햇볕을 쪼이는 것은 부드러운 태도가 아니라
그를 괴롭히는 짓이다.

따라서 그 우화의 교훈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부드러움이 언제나 미덕은 아니다.

어떤 사람의 행동을 바꾸는데는 채찍과 당근이 함께 필요하다.

그래도 일상에서 그 우화의 교훈을 따르는 것은 큰 문제를 낳지 않는다.

그것을 외교나 국방과 같은 일들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하긴 그 우화가 남북한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모형이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문제다.

사람의 외투를 벗기는 일과 북한의 태도를 바꾸는 일 사이에 도대체 무슨
유사성이 있는가.

"햇볕론"의 근본적 문제는 물론 그것이 유화책이라는 사실이다.

유화책은 언제나 실패한다.

악명 높은 "뮌헨 회담"이 잘 보여주었고 "민족적 양심을 앞세우면 풀지못할
것이 없다"는 구호를 앞세운 김영삼 정권의 대북한 정책이 일깨워준 것처럼
자신의 공격적 자세가 상대방의 양보를 불러오는데 왜 공격적 자세를
버리겠는가.

게다가 그것은 보기보다 위험한 정책이어서 전쟁의 위험을 늘린다.

자신의 공격적 자세가 상대의 양보를 불러오면 그 나라는 한걸음 더
나아가도 상대가 물러나리라고 여기게 되어 마침내 물러날 수 없는 데로
상대를 밀어붙이게 된다.

그래서 "뮌헨 회담"은 2차대전을 불렀고 김영삼 정권의 정책은 남북한
사이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켰다.

그러나 "햇볕론"엔 그런 일반적 결합들 말고도 그것만이 안은 문제가 있다.

생생한 우화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북한의 태도가 이내 우호적으로
바뀌리라는 환상을 시민들에게 준다.

북한은 그렇게 태도를 바꿀 마음이 없다.

설령 북한에 그럴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기술적으론 전쟁 상태인 남북한
사이에선 이번의 잠수정 사건과 같은 우발적 사건들이 거의 정기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런 사건들은 여론을 자극하므로 "햇볕론"은 그 정권에 무거운 짐이 된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현재의 상황은 우리가 유화책을 쓰는 것이 현명치
못함을 가리킨다.

북한이 우리를 얕보는 것은 우리가 얕보일 일들을 많이 해왔기 때문이다.

이번 잠수정 사건에서 우리가 보인 태도는 전형적이다.

사건을 다루는 정부와 여당의 태도가 미흡했다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미흡함이 유엔군과 북한의 장성급 회담을 고려한 데서 나왔다는 것이
실은 더 큰 문제다.

지난 91년 우리는 미군 장군들이 맡아온 군사정전위원회의 국제연합군
대표에 우리 장군을 임명했다.

그러나 북한은 그의 임명을 인정하지 않아서 군사정전위원회는 마비됐었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우리가 북한에 항복하는 자리가 바로 그 장성급
회담이었다.

그 자리가 빛이 바랠까 두려워 우리 언론은 그런 사정을 보도하지 못했고
여당은 "잠수정이 출현했다"고 논평하는 마당에 북한이 우리를 대접해줄까.

그러나 현 정권은 우리가 꿋꿋하게 나가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여길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꿋꿋한 태도를 떠받칠 만큼 굳은 정치적의지를 우리 사회가
이루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현 정권은 유화책이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유일한 정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유화책을 "햇볕론"이란 틀로 정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햇볕론"은 살아남는 재주를 지닌 견해다.

그래서 그것을 아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의 본질을 제대로 살피고 정부에 보다 튼실한 이론적
틀을 마련하라고 요구한다면 그 폐해를 줄일 수는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