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없는 시대라고들 하지만 지금처럼 어려울 때야말로 정신을 풍요
롭게 해줄 희망의 철학이 가장 필요합니다.

선거로 들뜬 사회를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경제와 정신문화의 뿌리를
되찾아야죠"

원로철학자 김영철(69.고려대 명예교수)씨가 수상록 "사색의 즐거움"
(자작나무)을 펴냈다.

이 책에는 40년동안 강단에서 철학을 강의해온 노학자의 삶과 인간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이 들어있다.

어린시절의 추억이나 대학시절의 고민,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시각도
담겨 있다.

"대선후보들이 1백30~1백70개의 공약을 내놓는 것을 보면서 약속의 의미를
다시 생각합니다.

선거때만 되면 숱한 공약이 남발되지만 당선된 뒤엔 약속을 저버리기
일쑤였죠.

겉만 화려하고 내실이 없는 건 "죽은 철학"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우리사회가 본분을 잃고 휘청거리는 건 허세때문"이라면서 "허세를
부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들로부터 감탄을 자아내지만 현명한 사람으로
부터는 비웃음을 산다"고 말했다.

광복직후 대학 진학문제로 고민하다가 철학과를 선택한 것도 개인과 사회의
정신이 올바로 서야 나라가 강건해진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고.

"당시엔 좌우대립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어요.

나부터 인생관을 정립하자는 생각에 인기있던 정치학과대신 철학과를
택했죠"

그래서 그는 "자신부터 단단하게 다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에게 심부름을 시킬수는 있어도 삶을 대신하게 할 수는 없지요.

자아의 확립을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철학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합니다"

그는 프랑스 중등학교인 리세의 경우 문과생의 연간 철학수업이 2백60시간
에 달한다고 소개했다.

대학입학자격시험에도 "창조와 생산은 같은가" 등 철학문제가 출제된다는
것.

"철학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철학적 태도"를 길러주는 일입니다.

암기된 지식은 시간에 따라 망각되지만 몸에 밴 태도는 좀체 지워지지
않거든요"

그의 철학적 태도는 자식들의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미국 제네럴일렉트릭사 인공위성연구소에 근무하는 큰아들과 대우전자
연구소차장인 둘째, 한국해양연구소 선임연구원인 막내는 모두 이같은
가르침에 따라 성장했다.

정년퇴임후 수요일마다 산을 찾는다는 그는 "사회 전체가 철학의 즐거움
으로 환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경남 함양태생인 김씨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도덕적 의무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고려대 도서관장과 문과대학장, 한국철학회
윤리연구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윤리학" "도덕철학의 제문제" "철학개론" "한국윤리사상사" 등이
있다.

<고두현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