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이 긴급자금지원을 조건으로 한국정부로부터 받아낸
무역자유화 부문의 약속을 보면 IMF는 국제 자금지원창구라기 보다 미국과
일본 등 몇몇 선진국기업을 위한 통상압력단체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IMF가 요구한 개혁안들은 외부의 압력을 받기전에 우리가 주체적으로
시행했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러나 적어도 통상부문을 놓고 볼 때 자동차 자가인증제 도입이나 수입선
다변화제도 폐지 등 미세하고도 세부적인 문제들은 분명 IMF차원에서 거론할
문제는 아니다.

어느모로 보나 다자간 또는 쌍무협상을 통해 타결해야 할 이같은 쟁점들을
미국과 일본은 이번에 IMF를 내세워 단숨에 관철시켰다.

더욱 우려를 자아내는 것은 이번 일을 계기로 "IMF를 통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인식이 선진국 기업들에 널리 퍼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실제로 미국의 자동차 및 반도체업계의 움직임을 보면 앞으로 미국과의
통상분쟁이 새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라는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한국자동차시장에 대한 슈퍼301조 발동을 위해
미국 자동차업계에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서를 제출토록 했으나 마감시한을
넘기고도 의견서가 접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슈퍼301조 발동까지는 최소한 1년 이상의 시일이 걸리기 때문에
이번처럼 IMF를 통해 신속히 해결하려는 전략이라고 한다.

이제 미국 자동차회사들은 IMF를 USTR보다 훨씬 더 능력있는 해결사로
인식하기에 이른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일부 반도체회사들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50억달러 구제금융지원
조건에 미국 반도체업계의 요구사항을 반영토록 강력한 로비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의 스티브 애플턴사장은 미국이 자금지원에 앞서
한국 반도체산업의 구조조정을 요구하도록 미국의회 등을 상대로 로비활동을
벌이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을 정도다.

물론 이러한 미국 업계의 방자한 태도는 그동안 미국 기업들이 보여온
경제대국의 패권주의적 횡포로 보아 새삼스런 것은 아니며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요구앞에 IMF가 너무도 무력하게 굴복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앞장서 금융 외환위기와는 직접관련이 없는 부문까지
간섭하는 월권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그동안 IMF는 금융 외환위기에 빠진 나라들을 위기로부터 건져내는
"에인절"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쌓아왔다.

이같은 국제사회의 신뢰가 IMF관리자들의 무분별한 월권행위에 의해
무너진다면 IMF뿐만 아니라 지구촌 모든 나라들에 불행이 아닐수 없다.

IMF를 "구원의 탈을 쓴 약탈자"로 보는 일부의 시각이 설득력을 얻기 전에
IMF는 본래의 기능과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IMF는 통상압력의 창구도, 통상분쟁의 해결사도 아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