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최근 여자를 그리워한 적이 없었다.

어디에도 잡초처럼 여자들이 널려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빼앗지 않고도 행복해질 수 있고 손해도 볼 수 있다는
사랑의 마음이 절로 샘물처럼 고이는 것이다.

확실히 그는 변했다.

딴사람처럼....

맥주를 한컵 다 마시는 동안 그가 한마디도 안 하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미아가 원망스러운 듯 노려본다.

"그 여자, 약혼녀를 생각하고 있지요?"

"그래. 어떻게 내 마음을 알지? 미아는 대단하네"

"그 여자는 무얼 하는 여자에요. 몇살이고? 예뻐요?"

"응. 이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없어. 내가 사랑한 최초의
여자야"

그는 맥주를 쭉 들이켜면서 결혼을 할 수 없는 영신이 그리워 눈물이
고인다.

오늘밤 그리운 것은 오직 영신이다.

"오빠, 왜 울어? 미안해요, 울게 해서. 슬픈 얼굴 보는건 질색이야. 나는
아버지가 없어요.

가끔 어려서 아버지를 그리워 하면서 막 울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미아도 눈물이 글썽해진다.

한잔의 술이 그들을 아주 슬프게 했다.

요새 술을 안 마시고 지낸 지영웅도 한잔의 맥주에 센티해져서 코를 풀며
억지로 미소 짓는다.

"오빠가 눈물을 흘리니까 정말 너무너무 마음에 든다.

나는 오빠같이 근사하게 생긴 남자를 이 세상에 나서 처음 만났어요.

내 별명은 "알미늄 장미"에요.

그런데 어느날 부턴가 오빠 때문에 살아 있는 장미가 됐어. 세상을 보는
눈도 트이고 가슴속에서 불같은 것이 끓어오를 때도 있구요.

오빠는 내게 불의 화살을 당긴 아폴로야"

지영웅은 오래간만에 여자의 애끊는 프로포즈를 받자 긴장이 되면서
다시 공포에 휩싸인다.

칼자국이 아직도 만져지는 목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자신을 타이른다.

나는 영신의 남자다. 오직.

"미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미아의 자유이고, 나는 이미 주인이
있는 몸이니까 나를 향해서 그런 상상을 한다면 깨끗이 단념해줘.

그리고 다시는 나를 만나려고 하지마.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길이야"

"네. 나는 오빠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원하고 있나봐. 이런 감정은 사랑
이상이야. 알아 오빠? 이건 사랑 이상이야"

미아는 거의 울려고 하다가 무슨 생각에서 인지 슬프게 웃으면서
맥주잔을 높이 든다.

"오빠 말 잘 알아들었어요.

부담주지 않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오빠, 하루만 나의 모델이 되어 주세요.

다시는 망보고 그러지 않을게요.

언제 시간을 주시겠어요?"

"글쎄, 내가 워낙 바빠서, 매일 8시까지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당분간은
어려워. 시간이 나면 내가 삐삐칠게. 곧장 화구를 들고 달려와"

그는 우선 미아에게서 도망치고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