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5일, 봄 경치가 아름답고 꽃이 난만했다.

오색 구름속에 학과 난새가 날고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깃으로 만든
지붕에 경옥바퀴가 달린 수레가 나타났다.

깃발을 든 신선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며 그는 그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조선 효종때 사람인 홍만종은 "해동이적"에다 당나라 종남산 자우곡에서
신선이 되어 승천하는 신라인 김가기 (?~859)의 모습을 중국의 "열선전"
에서 뽑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좀 허황된 이야기기는 해도 그는 죽기 한 해전인 858년 12월 당나라
문종에게 글을 올려 "신은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아 영문대시랑이 되기
위해 매년 2월25일 승천한다"고 선거일까지 예언해 그 날자오곡에는
조정관리를 비롯한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그의 승천모습을 지켜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또 "사림 기"에는 그뒤부터 중국인들은 그가 진선임을 믿어 승천일에는
모두 그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해 놓았다.

"해동전도록"에 따르면 김가기는 최승우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갔던
신라의 유학생이었다.

당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하던 과거인 빈공과에 급제해 진사가 됐는데
일설에는 벼슬이 화주참군 장안위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그는 성품이 도를 탐구하기를 좋아해 벼슬을 그만두고 종남산 자오곡에
은거하며 노자의 "도덕경"과 선서들을 심독하고 항상 명상에 잠겼다.

이때 그가 최승우와 함께 의상이 거주하던 광법사로 천사 신원지를
찾아가 그의 소개로 종이권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도서와 구결을
전수받아 후배인 최치원에게 전했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김가기는 자오곡에서 3년여의 수련끝에 당시 중국의 도교에서
횡행하던 우화등선하는 장생불사약인 금단을 만들지 않고도 수련을 통해
체내에 기를 축적해 단을 만드는 단학을 확립했다.

이 본성적 단학이 신라에 전수되고 고려 조선에 면면히 이어져 퇴계나
율곡같은 유교의 선비들까지 건강유지법으로 활용해온 도교적 양생법이다.

우리의학의 결정인 "동의보감"도 결국 도교의학의 소산이다.

아주대 사학과의 변인석교수가 최근 중국 서안의 종남산 자오곡에서
김가기가 신선이 되어 승천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마애각문"을
발견하고 승천터와 칩거터도 찾아냈다고 학계에 보고했다.

근래에 김교각스님의 행적이 밝혀진 것과 함께 신라인들이 중국에서
얼마나 큰 족적을 남겼는지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해줄 귀중한 유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