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밤 창밖을 내다본다.

어디론가 달려가는 자동차의 불빛들.저마다 벅찬 하루일과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리라.오늘하루가 비록 고단했을지라도 꿈이 있는한
내일은 용기와 희망의 하루가 될 것이다.

그러나 꿈이나 희망이란 과연 어느정도 실현가능성이 있는 걸까.

또 그 꿈의 실현은 행복한 삶과 일치될까.

한사람의 의료경영인으로 신들린 듯 달려온 10여년.요즈음엔 그동안
잃어버려야 했던 것과 얻은 것에 대한 만감이 교차되곤 한다.

그리곤 문득 세속적 명리와 상관없이 가난하고 병든자에게 등불처럼
환하게 서 계시던 아버지의 길을 흉내나마 내보려 애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집안에서 유일한 남성이었던 아버지는 우리에게 아버지 이상의 정신적
지주였다.

"강건한 사람이 되리라,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곁에 서있으리라,개인의
안일보다 의미있는 일에 생애를 바치리라"소녀시절 일기장은 늘
이런 이상과 공명심으로 가득찬 문구뿐이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한사람의 아내나 어머니로서의 자리보다 막연하지만
사회적이며 실천적인 여성의 역할에서 삶의 명분을 찾으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그런 꿈은 나에게 병원경영인이라는 흔치 않은 길을 선택하게
했다.

그러나 진료와 경영이 이원화되지 않은 우리사회속에서 전문병원경영인의
길을 걷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더욱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적잖은 장애요인이 되곤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아니 거의 모든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치료와
병원경영을 겸한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병원마케팅을 공부하는 동안 절실하게 느낀것은
이런 구조적 모순의 해결과 의료서비스의 다각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의료개방이후의 무한경쟁에서 국내의료계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최대고통인 병은 어리석은 집착과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할수 있다.

어질고 욕심이 없는 사람은 정신이 자유로운 만큼 육신 또한 건강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우리를 현혹시키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돈과 명예 지혜를 모두 갖고자 허덕이다보면 자연히 건강을 잃게
된다.

육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향해야 하는 목표는 아무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삐를 늦추지 못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병원의 당면과제는 무엇인가.

혼자힘으로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기 어려운 환자들에게 의사는 누구보다
가깝고 신뢰받는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병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의사는 환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치료받을수 있도록 심신 모두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두렵고 견디기 어려운 부정적인 장소로서의 병원에
대한 이미지 또한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한다.

영혼과 육신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 망설임 없이 찾아가 몸을 누이고
싶은 곳,몇알의 약과 성능좋은 기계로 환자를 다스리는 곳이 아닌
휴식과 평화를 제공받을수 있는 곳,그런 곳이 필요한 때가 됐다.

힘들게 쌓아올린 개인병원의 이름을 버리고,어렵게 모은 사재를
털어 비영리법인을 설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웃었다.

그렇지만 나는 사막을 건너는 심정으로 이 위태로운 일의 첫삽을
뜨기 시작했다.

일몰을 바로볼수 있는 바닷가와 자연림속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치료받거나 병을 예방할수 있는 휴양병원(호스텔)을 세우는 일,그
결과 치료의학이 아닌 예방의학의 메카를 만드는데 앞장서고 싶다.

예방의학에 충실한 병원이야말로 진정 국민건강을 지킬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