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30년대 초반에 태어나서 국민학교(그때는
소학교) 6학년때 해방을 맞이했고 중학교 5학년때 6.25가 일어났으니
그 당시의 시대도 어수선했지만 특히 졸업하던 해에는 모두 격변을 치른
셈이다.

그런 까닭에 학교동창회를 구성한다거나 친구들끼리 무슨 모임을 차분히
가져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필자가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공직에 근무하고 사회도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무렵 유년기의 꿈과 기억들을 잊지 못하고 그 흔적들을 다시
끌어모으기 시작한 것은 나이 서른이 되어서였다.

지금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을 고향도 없는 사람들이라 하고 나도
한편으로는 고향을 빼앗겨 버렸다는 아쉬움이 들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는 서울의 어느 한 귀퉁이에 삶의 가장 순수한 터전이자 공간이었던 고향의
흙내음이라든지 한동네 친구가 있었다는 향수가 어렴풋이 남아 있었기에
몇명의 국민학교 동창들을 어렵사리 만날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안우회란 모임을 갖기 시작한 것이 32년전.

내가 다닌 안산국민학교는 독립문을 지나 무악재를 오르면 왼쪽으로
인왕산을 마주보며 안산자락(지금의 홍제2동)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안우회란 이름을 짓게 되었다.

나와 지금 만나는 이 친구들의 집은 대부분 길건너편인 무악동에 있었는데
안산국민학교 5회 졸업생은 모두 23명이다.

많지는 않아도 한동네에서 태어나 50년동안의 우정을 나눌수 있다는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한달에 한번 모여 여행도 하고 등산도 하고 또 한적한 음식점에서 만나
정담도 나눈다.

코흘리개적부터의 이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풀어
놓을수 있어 좋다.

또 아들 딸 사위문제에서부터 마누라문제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조차도 서로 이해하고 있다.

이제 이럭저럭 나이도 예순이 넘었고 나와 교직에 있는 몇친구를 빼놓고는
공직에서 모두 물러난 처지여서 우리들의 모임은 점점 더 큰 의지처가 될
것같다.

내가 이 좋은 친구들을 만날 때면 잃어버린 고향을 느끼기도 하고 아직도
어린날의 동심으로 돌아간 것같은 착각속에 빠지곤 한다.

앞으로도 지나간 시간위로 우정의 꽃은 활짝 피어날 것이다.

만났다 헤어진 뒤에는 다음 달의 모임이 다시 기다려진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