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 비틀어 지는 것은 비단 곡식뿐이 아니었다. 불만 그어대면 땅덩이
전체가 그대로 불바다가 될 형편이다"

유례없이 비 한방울도 내리지 않고 폭염이 오래 이어진 금년 여름은
소설가 이무영이 "기우제"에서 그려 놓은 것처럼 식물은 물론이고 인간과
짐승까지 후줄그레 시들게 만든 무서운 정복자로 군림했다.

물고기와 닭이 떼죽음을 당하고 보기조차 사라졌다면 그 무더위의 위헤를
짐작할만 하다.

그러나 맹위를 떨쳤던 이 정복자도 대자연의 질서를 거스리지는 못하고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어제가 입추였으니 이미 가을이 문턱에
들어선 셈이다.

오는12일 말복이란 고비가 하나 더 남았지만 이날 옛 사람들이 하던대로
팥죽이나 쑤어 먹고 마지막으로 땀을 흠씬 흘리면 23일에는 처서가 들이
닥쳐 아무도 모르게 가을이 성큼 다가올 것이다.

양력과는 거의 달포씩 차이가 나지만 음력 7월은 초가을(맹추)이다.
미어진 미닫이의 창호지를 새로 발라 말리는 철이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 진다"는 속담처럼 더위도 한풀 꺾인다. 어쩌다
늦더위가 오기도 하지만 밤에는 서늘한 바람일 불기 시작한다.

이 무렵이면 농가에서는 이미 김매기를 끝내고 "호미씻이"를 한뒤이고
무우 배추를 심는것외에는 9월까지는 할일이 별로 없어 "미끈6월,어정7월"
"어정7월,건들8월"로 불릴만큼 한가해졌다. 5월이 모내기와 보리수확으로
몹시 바쁜 달이어서 "발등에 오줌싼다"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말이다.

음력7월 보름인 백중날은 망혼일인데 이날 절에서는 망친의 혼을 위호
하는 맹난성제의 독경소리가 진종일 그치지 않았다. 백동장 열러 흥겨운
씨름판이 벌어진 것도 이날이었다. 모두 가을맞이 축제의 서곡이었던
셈이다.

그러는 사이에 들판에서는 오곡이 무르익어 갔고,북쪽 하늘에서 기러기가
울며 날아오고 은하수가 점점 하늘 한복판으로 흘러내리는 가을이 온다.
누군가는 가을을 "여름이 타고 남은것"이라고 했다.

가뭄과 북핵문제, 김일성사망과 그 여파들이 우리를 더 무덥게 했던
1994년 여름이 재만 남기고 서서히 가고 있다. 이 여름의 마지막 발악이
될 초대형 태풍"더그"를 이겨 내노라면 어느새 가을은 우리곁에 와있을
것이다.

가을은 모든 것을 정리하는 계절이다. "어정7월,건덜8월"이 되지 않도록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떨쳐 버리고 풍요로운 수확의
가을이 되도록 빈틈없이 준비하는 지혜가 아쉬운 절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