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는 첨단과학기술의 집약체인데다 하늘을 날며 사람을 수송하는
교통수단이다. 항공기를 다루는 기량의 습득은 자동차 운전면허를 취득하듯
짧은 시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대형 여객기를 조종하는 한 사람의
베테랑 기장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5년이상의 장기간에 걸친
훈련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

지금 대한항공에는 1천명이 넘는 조종사와 1백50여명의 항공기관사가
안전운항의 첨병으로 근무하고 있다. 민영화 당시에는 조종사 항법사 항공
기관사등을 모두 합쳐 46명이 전부였다. 노선과 보유기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운항승무원수를 늘리고 기량을 갈고 닦는데 많은 공을 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민항의 역사가 짧은 당시 실정으로는 운항승무원 대부분을
전역한 군 출신들로 충원해야만 했다.

군 경력자들이라고 해서 채용과 함께 즉시 현업에 투입할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각기 다른 경험과 기량으로 민항에 들어왔으므로 상당기간의
재교육이 필요했다. 하나의 예로서 군경력자들은 시계비행 경험은 많았으나
민항은 계기비행 위주여서 이러한 능력을 추가 배양해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민항 조종사는 수백명의 생명을 책임지게 되는 만큼 계속적인
훈련과 완벽한 기술습득이 필수적이다. 군에서 전역후 적어도 10년이상의
운항 훈련과 경험을 쌓는등 각별한 신경을 써야 대형기의 기장이 될수 있는
것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조종사 훈련은 대부분 해외 위탁훈련에 의존해야 했다.
훈련시설이나 장비는 물론 전문훈련요원들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71년 처음으로 미국에 취항할 때는 조종사들도 미연방항공국(FAA)에서
발급하는 면상이 별도로 필요했으나 이를 소지한 조종사가 거의 없어 애를
태우기도 했다. 태평양노선개설을 위해 B707제트기를 들여 왔지만 당시
미국운항조종사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미FAA가 인정하는 면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비행기도입과 함께 이 면상의 획득이 중요한 일로 대두된 것이었다.

급히 외국에서 강사를 초빙하여 교육을 시키는 한편 FAA에서 시험관을
우리나라에 파견토록 주선해 필기와 실기시험을 치르기까지 했다. 결국
전원이 합격하여 시험관을 놀라게 하기도 했는데 대한항공조종사의 우수한
능력을 처음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계속된 항공기의 대형화와 현대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늘어난
국제노선을 운영하기 위해서도 운항승무원의 전문지식과 경험등 고도의
기량이 필요해졌다. 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83년 미국에서 계기
비행 훈련장비(GAT-III)를 도입했다. 신규 조종요원의 제트기 비행능력을
높이고 기성 조종사들에 대해서 보완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주력 기종인 B747점보기의 모의비행훈련장비(시뮬레이터)를 도입
하였다. 이러한 장비를 활용하기 위해 당시 1백20억원이상을 투입하여
인천에 비행훈련소를 개설했다. 승무원의 자체 훈련에 본격적으로 돌입함
으로써 철저한 안전운항훈련체계를 갖추었다. 시뮬레이터는 실제로 날지는
않지만 이.착륙을 포함한 기상조건등 비행의 모든 상황이 실제 항공기와
똑같이 오감으로 느끼도록 컴퓨터에 의해 재현되는 것이어서 "뜨지만
않을뿐 실제와 똑같은 비행기"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실기훈련을 위해서는 83년6월 제주에 활주로및 관제탑시설과 훈련기를
갖춘 비행훈련장 건설에 착수했다. 이 훈련장은 88년 조종사 자체 양성
기관인 기초비행훈련원으로 활용해 국내 초유의 민항 조종사 산실로 발전
했다. 기초비행훈련원은 선진항공사들의 본고장인 독일과 일본, 영국및
미국의 여러 항공사를 방문하여 그들의 노하우를 파악해 설립한 것이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점보기 이.착륙까지 가능한 세계적 규모의 비행훈련장
건설을 벌써 이루었을 것이나 몇가지 뜻하지 못했던 타의적인 이유들로 이
비행훈련장을 확충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항공사업이란 이렇게 일반인들의 눈에 비치지 않는 곳에서도 많은 투자를
필요로 하는 사업이다. 더욱이 연료비용의 격변과 외국 항공사들과의 엄청난
경쟁, 적자노선에서의 손실, 고정비용의 증가등을 감안하면 투자에 비해
이윤이 보잘것 없는 외줄타기사업이 아닐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