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계획목표에 대해 국내외의 많은 비판도 있었다. 국내 일부언론에서는
"2차계획은 통계자료 계획기술면에서 진일보했으나 내용에 있어서
자본동원과 자본배분측면은 엉성한데가 있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세계은행은 처음에 성장및 수출목표,그리고 내자조달계획등이 너무
의욕적이며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집행됨에 따라 실적이 목표치를 상회하고 3차연도말에 이르러서는
이미 대부분의 목표가 달성됐으며 특히 수출이 크게 증가하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앞장서서 한국경제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제3차5개년계획을 작성할
시점에 이르러서는 게획목표가 오히려 너무 낮게 책정되었다고까지 했다.

당시 세계은행의 5개년계획평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당시 세계은행주관으로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구성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는데 한국이 계획수행에 필요한 많은 외자를 차관으로 도입하기
위해서는 이 기구의 설립과 여기에서의 한국경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절대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은행은 굴하티씨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한국에
파견,2차계획을 분석 평가토록 했다. 이 조사보고서는 2차계획이
"가치있고 잘 입안되었으며 실행가능성이 있는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 1966년12월에 IECOK는 세계은행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설립되어
해외로부터의 외자유치에 많은 기여를 했다.

계획의 총량적인 측면에서 실적을 보면 기간중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7%로 계획치 7%를 크게 웃돌았다. 투자율도 기간중 평균 26.4%로 계획치
19%를 크게 상회했다. 특히 수출은 초년도부터 계획치를 크게 앞질렀다.
목표연도인 71년 수출은 11억3천만달러를 기록,목표치5억5천만달러의 2배에
달했다.

2차계획은 시작도 하기전에 조기달성문제가 제기됐다. 국내외에서
계획목표달성이 힘들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65,66년의 경제운용실적이
계획을 훨씬 초과했기 때문에 2차계획은 조기에 달성될것이라는 예측이
강하게 대두됐다.

특히 장기영부총리는 조기달성론을 강력히 제기하며 2차5개년계획서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번 제2차계획에 대하여는 국내외에서 상반되는 비판이 있었다.
국내에서는 계획내용이 너무 소극적이라는 논의가 있었고 국외에서는 이와
반대로 계획목표가 너무 의욕적이라는 논평이 있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계획당국으로서는 "제2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란 이름에서
"5개년"의 석자를 빼고 우리경제 미래상의 부각진도를 지켜보아 달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장부총리 자신이 직접 쓴 글이었으며 그의 주장대로 2차계획은
3년째에 대부분의 목표를 달성했다.

2차계획이 조기에 달성될수 있었던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의욕적인 수출과 외자도입의 촉진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수출증대는 개발연대를 통해 일관해온 우리의 개발전략이었다. 국내
부존자원이 빈약하고 시장이 협소한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원자재를
도입하여 교육수준이 높고 손재주가 많으며 부지런한 많은 노동력을 활용,
좋은제품을 만들어 세계시장에 파는것만이 우리의 살길임을 인식하고
대외지향적 개발전략을 채택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수출제1주의를 표방하고 수출을 경제정책의 최우선으로
했다. 수출촉진을 위해 세제 금융 외환면에서 각종지원책을 실시하는 한편
매년 수출목표액을 설정하고 이를 초과달성하는 것을 상공부의 최대과제로
삼았다.

대통령이 매달 이를 직접 확인했다. 간혹 월간목표가 미달일때에는
대통령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내가 76년초부터 78년말까지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내는 동안에도
수출실적을 분석 보고하는것이 중요한 업무중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