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17년(1435)5월, 그런대로 평온했던 조정은 종친 한 사람과 젊은
궁녀의 애정행각이 드러나 발칵 뒤집혔다. 그 궁녀의 이름이 "장미"
였다는 것을 보면 아마 장미처럼 탑스럽고 매혹적인 여인이었나 보다.
장미가 병이 들었다고 핑계를 대고 사가에 나가 두어달동안 쉬고 있을때
일어난 일이다.

장미가 궁궐에서 나와 집에 있다는 소문을 할머니인 최씨에게서 들은
신의군 인은 할머니를 매파로 삼아 장미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죽은
첩의 딸까지 수양딸이라고 속이고 장미에게 몸종으로 주었다는 것이나
인의 할머니 최씨가 "장미는 인의 죽은 첩의 얼굴을 쏙 닮았다"고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인은 옛 애첩이 되살아난 것처럼 장미를 사랑했었던 것같다.

드디어 장미가 인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뒤이어 아주 인의 집에
유숙해 버리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은 한집에
있는 장미를 혼자만 두고 보기 아까웠던지 몇차례 잔치상을 차려놓고
동생들인 의 예 지 신 강 승과 매부 김경재 김유장등 친척까지 불러모아
장미에게 술을 따르게 하며 즐겼다. 그자리에서 장미는 춤까지 추었다.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았던 사람은 세종이었다. 애당초 그는 의친
(아주 가까운 친척)이 저지른 일이었기 때문에 더이상 시끄러워지기
전에 혼자 이들을 벌주기로 마음먹었다. 신의군 인등은 자신의 숙부인
익안대군(방의)의 손자들이었으니 조카였고 최씨는 숙모였다.

주범인 인은 직첩을 거둔뒤 먼지방에 추방하기로 정했다. 의등은
외방으로 쫓아버리고 장미를 비롯한 나머지 관련자들만 조율해 처벌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진상이 공개되고 말았다. 사헌부에서 조용할리 없었다.

"임금이 타는 말(노마)의 꼴을 걷어차도 벌이 있고 나이를 세어도 벌이
있다고 하는데 군상을 모만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습니다. 신하의
죄는 불경보다 더 큰것이 없고 더욱이 무례한 것보다 더 큰것이 없으니
이것을 놓아두고 베지(주)않으면 장차 무엇을 베겠습니까"
사간원에서도 소룰 올렸고 대간들이 연명으로 글을 올려 목을 벨것을
강청하고 나섰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 같았다. "사사로운 은혜로써
공의를 폐하는 것은 부가"라는 옹고집이었다.

한달여에 걸친 세종과 대신들간의 실랑이끝에 이 사건이 마무리지어졌다.
그것도 "태조의 후손들을 모두 축출하려 하느냐. 익안대군의 제사는
누가지내라는 말이냐"는 위압적인 세종의 역공으로 가까스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인은 왕족에서 서인이 돼 북방의 여연에 유배됐다. 의등 잔치에 참석했던
인의 동생6명은 직첩을 빼앗기고 역시 귀양길에 올랐다. 다른 관련자들은
곤장 1백대씩을 맞았고 최씨만 간신히 벌을 면했다. 종친이었던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아 사면됐을테지만 장미는 의금부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은뒤
죽지않고 살았다면 어느 관아의 종이 됐을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이상스럽게도 장미에 관한 기록은 의금부에 내렸다는 것 외에는 한줄도
찾아볼수 없다. "임금이 타는 말의 꼴을 걷어차도 죄가있다"는 대간들의
말에서 엿보이듯 말(마)보다는 궁녀를 높여준것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짐승아닌 인간으로 그들이 감수해야 했던 고통은 말(마)보다 별로 나을것도
없었다.
궁녀들은 왕권의 그늘에서 피고 진 꽃들이었다. 4,5세때 "아기내인"으로
궁중에 들어온 궁녀도 많았다. 13세이상이 돼 궁중에 들어올때는 팔목에
앵무새의 피를 묻혀보고 그 피가 묻으면 처녀이고 묻지않으면 처녀가
아니라는 판정을 거친뒤 처녀라야만 입궁할수있었다. 그때부터 늙어
죽을때까지 "생각시"노릇을 해야 했다. 왕의 침전에 한번이라도 드는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는수도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운 노릇이었다.

궁중에 유폐된 5백~6백여명이나 되는 궁녀들의 피맺힌 정한이 폭발되지
못하도록 한것은 무서우리만큼 엄격했던 궁중의 법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법도로 꽁꽁 얽어맨다해도 그들 역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항상 사고는
일어나게 마련이었다.

조정에서도 궁녀들의 맺힌 정한을 알고있었다. 국가의 불행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죄수와 함께 궁녀 수십명씩을 풀어준 예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독부함원 오월비상"이란 말의 참뜻을 임금도 모를리는
없었다.

한달에 쌀3말(두)남짓한 보수를 받고 꽃같은 젊음을 궁궐속에 유폐당한
수많은 궁녀들중에는 사랑의 대가치고는 너무 혹독한 값을 치른 "장미"
같은 여인도 있었다.

<부국장대우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