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이면 사이고는 야산의 언덕배기에 올라 바위위에 앉아서 사쓰마쪽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생각 저런생각에 잠기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다.

그것은 곧 한 여자의 지아비로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뒤로 물러가고,대신 다시 가슴속에 나라일에 대한 열정과
정치가로서의 야망이 꿈틀꿈틀 되살아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달이 가고 두달이 가도 사쓰마로부터 아무 기별이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었다는 소문도 들려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사이고는
다시 체념속으로 한발 두발 들어서지 않을수 없었다. 이이나오스케가
죽었다고 해서 막부가 무너진 것도 아니고,또 자기를 사쓰마로부터
쫓아내어 이섬으로 보낸 것은 다름아닌 시마즈히사미쓰니,그가 섭정의
자리에 건재한 이상 사쓰마로 돌아갈 가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섯달이 지난 구월초에 사이고는 오쿠보의 편지를 또 받았다. 그러나
반가운 기별은 없고,가슴아픈 소식이 적혀 있었다. 미도번의 다이묘
도쿠가와나리아키의 사망에 관한 사연이었다.

지난 팔월 십오일에 도쿠가와나리아키가 서거했는데,아무래도 그 죽음이
석연치가 않다는 얘기였다. 공식적으로는 병사라고 알려졌으나,자연사가
아니라 독살이라는 말도 있고,또 자객에 의한 피살이라는 풍문도 들린다는
것이었다.

"음- "
편지를 다 읽고나서 사이고는 대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사가
아니라,보복을 당한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쿠라다문의 변이 있은지 반년도 못되어 도쿠가와나리아키가 갑자기
죽었으니,필경 그 죽음에 무슨 의혹이 있는 것이려니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이나오스케를 미도번의 자객들이 주동이 되어
살해했으니,자기네 다이묘를 무참히 잃은 히코네번의 사무라이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틀림없는 그들의 보복이라는 것이었다.

미도번청의 공식발표는 지병인 각기(각기)로부터 오는
심근경색(심근경색)이 사망 원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발표를
믿으려 들지않았다.

아니땐 굴뚝에는 연기가 안나는 법인데,곧 그 연기가 나부껴 올랐다.

미도번의 한 자객이 팔월 십오일 야밤중에 도쿠가와나리아키의 저택담을
그림자처럼 뛰어넘었다. 그리고 곧 정원의 우거진 수풀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으나,달은 없어서 사방은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