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이 본격화하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미국의 기준’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TPP는 서비스와 농산물 등 여러 측면에서 미국의 최신 이해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TPP가 기준이 되면 이미 알려진 자동차, 철강 외에 서비스·농산물 등 한국이 껄끄러워하는 분야에서 미국의 요구가 거세질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 TPP 기준으로 개정 요구할 것…서비스·농산물이 핵심 타깃"
◆서비스 개방에 주안점 둔 TPP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14일 한국경제신문과 한 통화에서 “미국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 모든 무역협정을 TPP를 잣대로 ‘현대화(modernization)’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며 “한·미 FTA 개정 협상의 기준점 역시 TPP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산업통상자원부의 TPP 관련 자문기구인 ‘TPP 전략포럼’ 의장을 지낸 통상전문가다.

안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비록 TPP 탈퇴를 선언했지만 막상 NAFTA 재협상은 TPP를 기초로 진행되고 있다”며 “TPP는 미국이 자신의 이해를 깊숙이 투영한 가장 최신 무역협정”이라고 덧붙였다.

2015년 11월 협정문이 처음 공개된 TPP는 한·미 FTA보다 전반적인 시장 개방 수준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TPP 협정문에 포함된 규범 챕터는 총 30개다. 한·미 FTA(24개 챕터)에 없던 국영기업, 경쟁력 및 비즈니스 촉진 등 7개 챕터를 신설했다.

기존 챕터 역시 개방 정도를 대폭 강화했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서비스 시장이다. 안 교수는 “미국은 자국이 강점을 가진 디지털 무역 등 전자상거래 서비스와 관련해 굉장히 높은 수준의 규범을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TPP 전자상거래 규범에는 한·미 FTA에 없는 컴퓨팅 시설의 위치, 소스코드 등 8개 조항이 새로 들어갔다. ‘정보의 국경 간 이전 허용’ 등 기존 2개 조항은 ‘협력규정’에서 ‘의무규정’으로 강화했다. 정보의 자유로운 이전을 최대한 강조하는 미국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다.

이런 규범들이 한·미 FTA에 도입되면 국내법과 충돌해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TPP의 ‘정보의 국경 간 이전 허용’은 개인정보를 포함한 정보의 자유로운 국경 간 이전이 가능하도록 했다. 반면 국내법은 측량·의료정보 등의 이동에 일정한 제한을 두고 있다. 지난해 이슈가 된 구글의 지도정보 반출 문제가 다시 부각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이런 변화는 단기적으로 서비스 교역 적자를 심화시킬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산업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안 교수는 “과거 노무현 정부가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서비스산업 경쟁력을 높이겠다’고 했듯, 과감한 개방으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새로운 규범을 마련하는 데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농산물 추가 개방 요구하나

TPP에 포함된 국영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 금지 규범 역시 논란이 될 수 있다. TPP는 정부가 국영기업에 대한 비상업적 지원으로 상대국에 부정적 영향을 주거나 상대국 산업에 피해를 야기할 경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당장 한국전력 등 정부가 지분을 가진 30여 개 공기업이 적용 대상이 된다. 공기업을 손발로 활용해 각종 정책을 추진하는 한국 정부로서는 곤혹스러운 대목이 될 수 있다. 이런 내용의 TPP 협정문이 공개되자 당시 정부는 공기업들을 상대로 국영기업 규범에 저촉될 만한 부분이 있는지 전수조사를 하기도 했다.

한·미 FTA 개정 협상이 TPP를 준거로 이뤄질 경우 쌀 등 농산물 시장 개방도 다시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한국의 TPP 가입 조건으로 쌀 시장 추가 개방을 요구했다. 이미 일본은 TPP 협상 과정에서 농산물 시장을 파격적으로 개방했다. 쌀 시장의 빗장을 과감히 풀고 채소와 과일, 닭고기 등 관세도 대부분 철폐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