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취준생 울리는 '고용세습' 귀족노조의 배짱
‘장기근속자 가족 우선 채용’ ‘동일 조건이면 노동조합 추천자 채용’.

‘현대판 음서제’로 불리는 고용세습 단체협약을 유지하고 있는 사업장(상용근로자 100명 이상)이 300곳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노동부가 2015년 단체협약 전수조사에서 적발한 사업장에 지난해부터 시정명령을 내리고 있지만 절반 가까이 시정되지 않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법령 개정을 통해 고용세습 사업장 실명을 모두 공개하고 형사처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단독] 취준생 울리는 '고용세습' 귀족노조의 배짱
고용부가 2일 신보라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에게 제출한 ‘사업장 단협 우선·특별채용 조항 개선 현황’에 따르면 관련 규정이 포함된 722개 단협(694개 기업) 중 자율적으로 시정되지 않은 협약이 334개(46.3%)였다. 고용부는 지난해 3월 단협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우선·특별채용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동조합법)’ 위반으로 자율적으로 개선을 유도하고 시정하지 않으면 시정명령을 내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적발된 단체협약 중 절반 가까이가 특혜 조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신 의원은 “최근 일부 노동조합이 ‘채용장사’를 하다가 적발된 사건은 그동안 ‘노조 추천 지원자들은 무조건 합격한다’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노조들이 이 같은 단체협약을 근거로 채용 과정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각종 비리에 휘말리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인천지방검찰청은 돈을 받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채용한 한국GM 임원과 전·현직 노조 간부들을 기소했다.

‘고용세습’은 우선·특별 채용규정으로 통상 단체협약에 근거해 이뤄진다.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큰 회사일수록 이 같은 ‘특혜 채용규정’이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기아자동차 노사는 지난해 말 단체협약을 갱신하면서 정년퇴직자나 장기근속자(25년 이상) 자녀를 우선 채용하도록 하는 규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공정한 취업 기회가 박탈되고 노동시장 내 격차 확대와 고용구조 악화가 초래된다”며 고용노동부가 시정명령을 내렸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조 영향력 클수록 고용세습 많아

현대자동차도 단협 제23조를 통해 정년퇴직자 및 25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직계자녀 1명에 한해 동일한 조건에선 우선 채용한다고 규정했다. 현대차 노사는 2010년부터 ‘조합원이 업무상 사망했거나 6급 이상 장해로 퇴직할 시 직계가족 또는 배우자 중 1인에 대해 결격사유가 없는 한 요청일로부터 6개월 이내 특별 채용하도록 한다’는 내용의 우선 채용 규정에 합의했다. 고용부가 자율시정을 거듭 ‘명령’하고 있지만 노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노조와 각을 세우는 데 부담을 느끼는 사측은 속앓이를 하고 있다.

직원들의 처우가 좋은 사립대학 노조원들도 우선 채용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건국대와 고려대, 국민대 등은 관련 규정을 삭제했지만 A대, K대, G대 등은 우선 채용 규정을 유지하고 있다. D대 노사도 조합원이 업무상 순직 또는 공상으로 부득이 퇴직할 때 노조의 요구에 따라 직계가족을 우선 채용하도록 하고 있다.

중견기업들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N사는 정년퇴직자의 자녀가 회사에 취업을 요청하면 우선적으로 채용하도록 하는 단협을 유지하고 있다. B사도 불가피하게 퇴직한 조합원의 요구가 있으면 피부양가족을 우선 채용한다.

기득권 노조의 고용세습은 사상 최악의 취업난에 내몰린 청년들의 취업 의지마저 꺾고 있다. 3년째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장모씨(28)는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는 노조가 정작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고용세습을 서슴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공정하게 경쟁해서 취직하려는 입장에서 보면 저들이야말로 ‘진짜 금수저’란 생각에 좌절감이 든다”고 했다.

◆‘벌금 500만원’ 솜방망이 처벌

법원은 단체협약에 포함된 고용세습 관련 조항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장기근속자가 아니라 산업재해 사망자의 유족 채용에 대해서도 무효로 판결하고 있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해 8월 기아자동차와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다가 산업재해로 사망한 근로자 유족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회사 측에 일부 책임은 인정하면서도 직계가족 고용의무는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단체협약 규정이 일률적으로 채용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과도한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며 “청년실업이 심각한 상황에서 취업 기회 제공의 평등에 관한 기준은 엄격하게 정립돼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정치권에서는 고용세습을 원천 차단할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신보라 자유한국당 의원 등 의원 33명은 이날 ‘노조 채용비리 근절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결의안은 “유수의 대기업도 근로자 자녀 우선 채용 등 고용세습 조항을 유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고용세습 단체협약 사업장 명단을 공개하고 형사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고용세습은 지금도 처벌이 가능하다. 하지만 시정명령을 내린 뒤 개선되지 않으면 ‘500만원 이하 벌금’을 물리는 것이 고작이다. 신 의원 등은 이르면 이달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김동현/심은지 기자 3code@hankyung.com